신의 양보 – 왕국 1

(당신의 천국 – 열 일곱 번 째 이야기) 

요담의 우화(寓話) – 판관(사사)기 9장 8-15절에 있는 – 는, 임금 곧 왕이 된다는 것은 아무런 업적도 이루지 못하는 직업으로써,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런 자리를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임금의 체제 곧 왕정은 항상 폭군적 성격을 띤다고 가시덤불의 입을 빌어 이야기 한다. (한스 발터 볼프(Hans Walter Wolff)의 구약성서의 인간학에서) 

한민족의 첫 임금은 단군입니다. 잘 알다시피 단군은 하늘나라 임금인 환인의 아들 환웅과 곰에서 처녀가 된 웅녀 사이에서 나온 임금입니다. 이름하여 단군신화입니다. 

이런 첫 임금 설화는 한민족에게만 전해 지는 것은 아니지요. 고대 국가의 첫 임금들은 대부분 하늘, 태양, 달, 별 등 자연과 연계된 신화들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대부분의 고대 국가들은 시작을 왕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서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좀 다르지요. 

성서는 왕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 이야기(제가 글을 시작하면서 창세기부터 하지 않았답니다. 창세기는 나중에 요한 계시록 이야기 할 때 함께 하려고 합니다.)부터 시작되지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모세 이야기를 풀어 내고, 가나안 정복 후, 그것도 약 이백년이 지나서야 왕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사실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고 왕국을 이루던 그 시기에는 주변의 많은 나라들은 이미 왕권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요. 

마침내 왕을 세우고 이스라엘 왕국으로 들어서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책이 바로 사무엘서입니다. 

사무엘서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판관(사사)기의 두 곳 기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답니다. 

한 곳은 사사(판관)기의 마지막인 21장 25절입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 멋대로 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은 저 위에서 소개드린  9장 8-15절에 있는 요담의 우화입니다. 우화의 내용입니다. (한번 찾아서 읽어 보시길) 

나무들이 모여서 왕을 세우는 장면입니다. 나무들은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 나무 들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청을 합니다. 이 나무들은 모두 다른 나무들이 왕이 되달라는 청을 거절합니다. 나무같은 나무들에게 청을 거절 당한 나머지 나무들이 정말 나무같지 않은  가시나무에게 청을했더니 그 가시나무가 덥썩 그 청을 받아드리면서 공갈 협박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왕이란 이런 것이라는 왕에 대한 히브리족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왕은 야훼 하나님일 뿐이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마지막 절에는 왕이 없어서 제멋대로 하던 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이제 왕을 세우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 위안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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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사무엘상 1장에서 12장 까지를 보시면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왕이 즉위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답니다. 다시 한번 그 부분을 읽어 보시기를 권하면서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들의 천국을 찾기 위한 핵심이라는 제 생각이랍니다. 

첫째는 사무엘상 8장 7절에서 9절의 이야기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내리는 계시입니다. 

“백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들어 주어라. 그들은 너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나를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려 내 온 이후 이 날 이 때까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런 짓을 해 왔다. 너한테도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엄히 경고하여 왕이 그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를 일러 주어라.” 

이렇게 마지못해 내리는 야훼 하나님의 양보에 의해 사울왕이라는 첫 임금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 째는 사무엘서 4장에서 7장까지로 이어지는 블레셋이라는 외부의 적 이야기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일반적인 합리적 사고로 따지더라도 이 블레셋이라는 외부 세력의 침략이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게 된 직접적 동인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 때까지만 하여도 열 두 부족 동맹국이었으니 말입니다. 동맹국이라는 게 다 그런거 아니겠어요. 서로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관계 말이지요. 

강력한 적 앞에서 강력하게 뭉칠 힘이 필요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부족들이 느끼는 절실한 현실적 요구에 야훼 하나님이 응답은 하시되 정말 마뜩지 않은 응답을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 니들이 왕을 세울려면 세워라. 할 수 없다. 다만 이 것만은 명심해라.”라는 조건과 함께 말입니다. 

그  명심해야만 하는 조건들이란 사실 인간들이 지키기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랍니다. 구약 야훼의 역사관인 신명기적 역사관으로 본다면 인류 역사란 바로 그 감당하기 어려운 신과의 약속을 더 많이 이루려 애쓰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시작은 야훼 하나님께서 그리 마뜩찮게 생각한 역사의 시작이랍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은 그렇게 시작된 약 사백년의 왕국 역사 가운데 통일 왕국이었던 약 백년 동안의 이야기 곧  사울, 다윗, 솔로몬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과연 이들 시대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천국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말입니다.

쉬어가는 이야기 2 – 니가 뭔데?

“네깐 놈이 뭔데?” 또는 “니가 뭔데?”라는 질문을 누군가에게 받아 보셨거나, 스스로에게 던져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거나, 누군가 당신의 등 뒤에서 한 말을 듣지 못했을 뿐이라는 강변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보통 일반적 수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는 일입니다. 

스스로에게 “니가 뭔데?”, “내가 뭐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일 수도 있고, 어떤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을 때나 손해를 입게 되거나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피하려 할 때 사용하기도 하지요. 

누군가가 제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질문한 사람의 생각에 비추어 제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겠지요. 이럴 경우 대처하는 방법들은, 그 말을 들은 사람의 성격과 그 상황에 따라 아주 여러 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자리를 피할 수도 있겠고, 다툼이 일 수도 있겠거니와 제 삼자를 끌어 들일 수도 있을겝니다. 

이런 일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소한 일상에서 겪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조금 크기를 넓혀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말을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이 말은 내가 속한 국가 공동체가 정해놓은 헌법과 법률 및 자연법 곧 사람답게 살 권리 보장법 아래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뜻이지요. 

다른사람과 똑같이 법과 제도 아래서 “니가 뭔데?”라는 질문을 받지 않을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또한 국가라는 시민의 합의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에게  “니가 뭔데?”라는 질문이 마구 돌아다니지 않도록 요구할 권리도 있는 것이지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루고자하는 평등의 의미지요.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백성이 아니라, 법과 제도 아래서 누구나 평등해야 하는 시민들이 모인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이겠지요. 

그런데 다스리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시민보다는 백성이 훨씬 편한 일이고, 다스림을 받는 게 편한 사람들 역시 늘 있게 마련이고요. 그냥 그렇게 나누어져서 살면 좋겠지만 또 시민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왔지요. 그래 다스리고자 하는 자들과 시민이고자 하는 자들의 다툼이 있게되는 것이고 그런 일들이 연속되면서 역사가 이루어 진 것이지요. 

당연히 역사는 백성에서 시민들이 늘어가는 쪽으로 흘러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가겠지요. 

그런데 점점 돈의 권력이라는 힘이 세어지고, 시민으로서의 경험이 그리 많지 않거나 단기간에 백성에서 시민으로 바뀐 곳에서는 그 시민 앞에 수식어가 붙게 되는 것이지요.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거나 행동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거나 말입니다. 물론 불행한 사회이지요. 

이제 “니가 뭔데?”의 크기를 조금 더 넓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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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바로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다 평등한 모습으로 서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쓰고 있는 제 이야기 앞에 던져진  “니가 뭔데?”라는 질문에 대한 아주 간단 명료한 답이랍니다.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이 말을 “성서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로 대체 하면서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은 계속되는 제 이야기 속에서 이어질 것입니다. 

Layman 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말의 또 다른 뜻은 “이제 막 시작한” , “아주 초보적이어서 잘 모르는”의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아마츄어 곧 전문가가 아니라는 뜻도 담겨 있고요. 

성서연구방법론으로 유명한 한스 베버(Hans R Weber)의 말입니다. “종종 성직자들은 자기들만의 교회의 목회를 수행하려고 한다. 또한 평신도들은 그들의 목회를 한 사람 –성직자-에게 맡겨 버린다. 이 한 사람의 독무대(one man show)는 철저히 비성서적이다.”(‘Salty Christians-소금 노릇하는 기독인들’에서) 

교회안에서나, 신심이 돈독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말들을 하곤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목회자나 성직자는 말씀을 먹여 주는 사람이고, 평신도는 먹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아주 잘못된 일이랍니다.

이제 연재되는 제 이야기로 돌아가려합니다.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과 왕조 시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혹시 성서를 처음 읽는 사람이나 새롭게 성서를 알려고 다시 읽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저 나름대로의 성서 읽기 방법을 소개 드립니다. 그냥 제 경험과  아주 오래 전에 성서 스타디 그룹들을 이끌 때 유용했던 방법이기에 소개 드립니다. 

우선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죽 읽는 것입니다.  그냥 창세기 첫 글자인 “태”에서 계시록 마지막 “멘”까지 죽 읽어 보시라는 말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어떤 역본을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성서 한글 번역본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아무런 선입관도 갖지 마시고 자신이 읽게에 편한 번역본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야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살아있는 한글 세대들에게 읽기 적합한 번역본은 공동번역이나  표준 새번역 개정판일 것입니다. 그렇게 성서를 새롭게 읽는 기회가 되시는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제 이 글쓰기에 큰 의미를 둘 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냥 죽 쓰고 올리기 때문에 때때로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들도 있고, 맞춤법에 틀린 말들도 있어 읽기에 좀 불편하실 때도 있습니다. 일단 전체 이야기를 다 마친 후 교정을 보도록 할 것입니다. (현재 생각으로는 백 번 째 이야기 정도에서 마치려 합니다.) 

자! 이제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한 수 접고 이스라엘 왕을 세우게 되는 이야기로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