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2 – 니가 뭔데?

“네깐 놈이 뭔데?” 또는 “니가 뭔데?”라는 질문을 누군가에게 받아 보셨거나, 스스로에게 던져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거나, 누군가 당신의 등 뒤에서 한 말을 듣지 못했을 뿐이라는 강변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보통 일반적 수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는 일입니다. 

스스로에게 “니가 뭔데?”, “내가 뭐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일 수도 있고, 어떤 일에 대한 자신감이 없을 때나 손해를 입게 되거나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피하려 할 때 사용하기도 하지요. 

누군가가 제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질문한 사람의 생각에 비추어 제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겠지요. 이럴 경우 대처하는 방법들은, 그 말을 들은 사람의 성격과 그 상황에 따라 아주 여러 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자리를 피할 수도 있겠고, 다툼이 일 수도 있겠거니와 제 삼자를 끌어 들일 수도 있을겝니다. 

이런 일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소한 일상에서 겪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조금 크기를 넓혀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말을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이 말은 내가 속한 국가 공동체가 정해놓은 헌법과 법률 및 자연법 곧 사람답게 살 권리 보장법 아래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뜻이지요. 

다른사람과 똑같이 법과 제도 아래서 “니가 뭔데?”라는 질문을 받지 않을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또한 국가라는 시민의 합의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에게  “니가 뭔데?”라는 질문이 마구 돌아다니지 않도록 요구할 권리도 있는 것이지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루고자하는 평등의 의미지요.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백성이 아니라, 법과 제도 아래서 누구나 평등해야 하는 시민들이 모인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이겠지요. 

그런데 다스리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시민보다는 백성이 훨씬 편한 일이고, 다스림을 받는 게 편한 사람들 역시 늘 있게 마련이고요. 그냥 그렇게 나누어져서 살면 좋겠지만 또 시민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왔지요. 그래 다스리고자 하는 자들과 시민이고자 하는 자들의 다툼이 있게되는 것이고 그런 일들이 연속되면서 역사가 이루어 진 것이지요. 

당연히 역사는 백성에서 시민들이 늘어가는 쪽으로 흘러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가겠지요. 

그런데 점점 돈의 권력이라는 힘이 세어지고, 시민으로서의 경험이 그리 많지 않거나 단기간에 백성에서 시민으로 바뀐 곳에서는 그 시민 앞에 수식어가 붙게 되는 것이지요.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거나 행동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거나 말입니다. 물론 불행한 사회이지요. 

이제 “니가 뭔데?”의 크기를 조금 더 넓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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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바로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다 평등한 모습으로 서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천국”이라는 제목으로 쓰고 있는 제 이야기 앞에 던져진  “니가 뭔데?”라는 질문에 대한 아주 간단 명료한 답이랍니다.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이 말을 “성서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로 대체 하면서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은 계속되는 제 이야기 속에서 이어질 것입니다. 

Layman 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말의 또 다른 뜻은 “이제 막 시작한” , “아주 초보적이어서 잘 모르는”의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아마츄어 곧 전문가가 아니라는 뜻도 담겨 있고요. 

성서연구방법론으로 유명한 한스 베버(Hans R Weber)의 말입니다. “종종 성직자들은 자기들만의 교회의 목회를 수행하려고 한다. 또한 평신도들은 그들의 목회를 한 사람 –성직자-에게 맡겨 버린다. 이 한 사람의 독무대(one man show)는 철저히 비성서적이다.”(‘Salty Christians-소금 노릇하는 기독인들’에서) 

교회안에서나, 신심이 돈독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말들을 하곤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목회자나 성직자는 말씀을 먹여 주는 사람이고, 평신도는 먹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아주 잘못된 일이랍니다.

이제 연재되는 제 이야기로 돌아가려합니다.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과 왕조 시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혹시 성서를 처음 읽는 사람이나 새롭게 성서를 알려고 다시 읽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저 나름대로의 성서 읽기 방법을 소개 드립니다. 그냥 제 경험과  아주 오래 전에 성서 스타디 그룹들을 이끌 때 유용했던 방법이기에 소개 드립니다. 

우선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죽 읽는 것입니다.  그냥 창세기 첫 글자인 “태”에서 계시록 마지막 “멘”까지 죽 읽어 보시라는 말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어떤 역본을 보시느냐는 것입니다. 성서 한글 번역본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아무런 선입관도 갖지 마시고 자신이 읽게에 편한 번역본이 제일 좋습니다. 그래야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살아있는 한글 세대들에게 읽기 적합한 번역본은 공동번역이나  표준 새번역 개정판일 것입니다. 그렇게 성서를 새롭게 읽는 기회가 되시는 분이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을 뿐만 아니라 제 이 글쓰기에 큰 의미를 둘 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냥 죽 쓰고 올리기 때문에 때때로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들도 있고, 맞춤법에 틀린 말들도 있어 읽기에 좀 불편하실 때도 있습니다. 일단 전체 이야기를 다 마친 후 교정을 보도록 할 것입니다. (현재 생각으로는 백 번 째 이야기 정도에서 마치려 합니다.) 

자! 이제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한 수 접고 이스라엘 왕을 세우게 되는 이야기로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