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천국 – 열 여섯 번 재 이야기)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잘 살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 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안다는 것이다. (예레미아 22: 15-16, 공동번역)
“ 그 사람은 내가 잘 알지!”, “축구라면 내가 한 수 한다니까!”, “그 교회라면 내가 훤하지?” 등등의 말들 많이 들어 보시지 않으셨나요? 혹시 당신이나 제가 그런 말들을 많이 하는 축에 속하지는 않을까요?
누군가를 안다거나 어떤 사실이나 정황을 알고 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 아는 정도와 크기를 어떻게 계량 또는 계측하고 다른 이들의 앎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할 수 있을까요? 나아가 그런 비교들이 필요한 것인지,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런 이야기 좀 골아프지요?
자! 옛날 이야기로 돌아가 보지요. 삼천년 전의 가나안으로 말입니다.
탈애굽과 가나안 정복이야기(성서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서까지)와 이스라엘 왕국 건설 이야기 사이에 끼어 있는 책이 사사(士師)기 입니다. 공동번역은 판관기로 번역되어 있지요. 영어 성경으로는Judges라고 하고요. 재판관이라는 뜻으로 보자면 판관기가 적합한 것도 같고요. 히브리어 본래의 뜻은 재판한다, 또는 다스린다는 뜻 이외에도 구원한다는 뜻도 있답니다. 또 그런 의미에서는 사사라는 말도 적합한 것 같고요.
아무튼 사사기 2장 16절에 보면 “야훼께서 판관들을 일으키시어 약탈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 내시곤 하였다.(공동번역)”라는 있는데 구원자로서의 역할이 컷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사기에는 열 두 사사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왕권시대 직전의 사무엘도 사사라고 했고 그 두 아들도 사사라고 했으니 성서에 나오는 사사들의 수는 열 다섯으로 볼 수도 있고요. 바락장군 까지 넣어서 16명 이라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들이 한 일들 또는 야훼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한 일들은 사사기를 한번 읽어 보시길 바라고요.
제가 사사기를 이야기하면서 전해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두가지랍니다.
첫째는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족들을 위해 사사(판관)들을 세우신 까닭이랍니다. 이스라엘족들의 고백이기도 하지요. 바로 툭하면 야훼와 맺은 계약을 어기고 바알신 등 다른 신을 섬기거나 조상들보다 더 나쁜 짓들을(사사기 2장 19절) 일삼는 이스라엘족속에 대한 경고와 함께 구원을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들의 끊임없는 배신 행위에도 불구하고 야훼는 계약 상대인 을의 구원, 곧 이스라엘 족속의 구원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는 고백입니다.
두번 째는 성서 전체 이야기 중에서 “앎”에 대한 뚜렷한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앎” 곧 아는 일이고, 신의 입장에서 보면 “드러냄” 곧 계시입니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말은 지금 우리들이 찾아가고 있는 천국 곧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이르는 첫 번 째 핵심 열쇠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그의 드러남과 나나 우리가 그를 만나고 아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이 어떻게 나나 당신에게 나타셨는가? 그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모세는 직접 사람의 말을 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런 모세에 후계자입니다. 이 두 지도자들에게 나타났던 신 야훼는 스스로 드러내셨던 분입니다. 비록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끌었던 무리들이 때론 의심하고, 불신을 드러내긴 했지만 모세와 여호수아가 야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에는 깊은 신뢰와 믿음을 보냈습니다. 그런 고백들을 쉬지 않기도 했습니다.
사사시대 이후의 야훼 하나님의 드러남 곧 계시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바뀝니다. 직접 신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꿈이나 어떤 징후로 사람과 만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 신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세나 여호수아시대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와 사사시대 이후의 태도 사이에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드러남 곧 계시에 대해 모세나 여호수아시대의 사람들이 신의 계시를 보고 만났던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보낸 신뢰의 크기보다 사사시대 이후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 곧 사사들이나 예언자들에게 보내는 신뢰의 크기는 현저하게 작아진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일들이 점점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크기의 차이 곧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크기가 더는 작아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신이 택한 드러남의 방식이 바로 직접 계시였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첫 번째 전환점이 바로 사사기의 기록이라는 제 생각입니다.
얼핏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기 쉬은 사사기의 중요함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유다왕 여호야킴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너의 아비는 법과 정의를 펴면서도 먹고 마실 것 아쉽지 않게 잘 살지 않았느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 주면서도 잘 살기만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안다는 것이다. (예레미아 22: 15-16, 공동번역)”
신학자 본 훼퍼는 “신은 우리의 삶의 중심안에서 그 피안(彼岸)에 있다.”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저 하늘 위에서, 아니면 저 쪽 다른 세상 어딘가나 죽음 저 편 어딘가에서 불쑥 누군가에게만 특별히 나타나는 신이 아니라 나처럼 지극히 평범한 아니 평범 이하인 사람에게 조차 늘 일상적으로 하루하루의 삶 가운데 전능자와 구원자로서 드러나는 시대로 바뀌는 첫 번 째 시점이 바로 사사시대라는 말씀이랍니다.
계시에 대해서는 앞으로 여러번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말과 이야기로 계속될 것입니다.
계시, 구원, 하나님 나라 – 이 세 개의 단어는 제 이야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천국 이야기는 이제 왕국과 예언자의 시대로 접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