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천국 – 스물 세번 째 이야기)
다윗은 그 곳을 떠나 아둘람의 굴로 피해 갔다. 그의 형들과 그의 온 집안이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을 찾아 그리로 내려 갔다. 또한 억눌려 지내는 사람, 빚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 그 밖의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 다윗 주변에 몰려 들었다. 다윗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 수는 사백명 가량이 되었다. – 사무엘상 22: 1- 5, 공동번역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진입한 이후, 경제적으로는 토지에 대한 지파 공동재산 원칙이 점점 무너져 개인 사유 원칙으로 바뀌었고, 사회적으로는 종족간의 평등원리가 사라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부유한 땅 소유자들과 고대 사회질서의 유물인 가난하고 땅없는 농민들 사이의 괴리가 심해졌다. –롯스(Adolphe Lods)의 <이스라엘 역사 – 시초로부터 기원전 8세기까지>에서)
마온이라는 곳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기업은 가르멜에 있었다. 그는 양이 삼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가 되는 큰 부자였다. 그는 가르멜에서 양털을 깍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나발이요,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다. 아비가일은 재색을 겹비한 여자였으나 그 남편은 갈렉 가문 출신으로서 인색하고 거친 사람이었다. – 사무엘상 25 : 2-3, 공동번역
다윗은 유대땅에 사는 부유한 지주인 나발의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되었고, 또 블레셋인에게는 그들의 신하로서블레셋족속으로 받는 위험에 대해서도 보호하여 주었다. –군네벡(Antonius H. J. Gunneweg)이 쓴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음악가이자 시인이었으며, 삼손 못지않은 힘을 지녔었고(사무엘상 17 : 34-36), 언변도 뛰어났고(사무엘상 17 : 44-47), 빼어난 전사였으며(사무엘상 17 : 48-51) 무려 잘 생기기까지(사무엘상 16 : 13) 했었답니다.
그러나 다윗이라는 인물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은 이런 인간적으로 잘난 모습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찾아 가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다윗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서 전체 이야기의 흐름 가운데는 큰 봉우리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모세, 다윗, 요시아, 세례요한, 바울, 묵시록의 요한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지금 누리며, 앞으로 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 길목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는 길목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히브리족 사이에 맺은 계약의 핵심 당사자입니다. 여기서 “계약”이라는 말은 우리들이 성서나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가 쉬운 말들로 설명해 준 하나님 나라와 바울이 어려운 말로 해석하는 하나님 나라, 이 모두를 우리들이 잘 이해하고 누리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 계약의 틀을 제도화한 사람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첫째는 이 계약(야훼 하나님과 유다 사이에 맺은)의 영역을 확대한 사람입니다. 이 계약의 틀안에 들어 와야만 하는 백성들의 지경을 넓힌 일입니다.
두번 째는 흩어져 있던 계약에 대한 이런 저런 각종 이야기들과 전승들을 하나로 묶고, 예루살렘 한 곳으로 모든 계약의 권위와 그 계약에 따른 모든 제사권을 중앙집권화하는 틀을 세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다윗 이전과 다윗 이후의 이스라엘족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는 다음 글에서 잇고요, 다윗이 어떻게 이 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다윗과 이스라엘의 신앙적 고백에 대해서는 그 다음 글에서 다루면서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넘어 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신앙적 고백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조건으로 보았을 때 다윗이 블레셋을 물리치고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왕국 이스라엘을 세울 수 있었던 까닭을 알아 보려고 합니다.
다윗 개인의 여러 잘난 모습들은 제껴 놓더라도 결정적인 요인 세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이 이끌었던 군사들이고, 둘째는 다윗의 여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인간적 요소들이 다 담긴 다윗의 성품입니다.
첫째 다윗이 이끌었던 군사입니다. 이 점은 사울과 다윗이 비교되는 결정적 차이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열 두지파가 세운 첫 왕이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군대는 각 지파들이 약속과 필요에 따라 내어 놓은 군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군대는 지난 글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블레셋과는 비교되지 않는 열악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지휘하는 군대와 블레셋군의 전력 차이의 상징적인 비교가 바로 다윗과 골리앗의 비교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초반 전투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 승리요인은 바로 야훼 하나님이 이끄는 성전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초기 싸움을 이끌었던 사울부대의 병사들을 움직였던 힘은 사울이 아니라 사울과 함께하는 신 야훼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려 사울군대는 야훼의 믿음으로 뭉쳐진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연합관군인 셈입니다.
다윗이 이끌었던 부대는 다릅니다. 다윗의 부대는 일종의 용병이었고, 다윗은 용병대장이었습니다.
애초 사울의 한 부대를 이끌고 있었던 다윗은 사울과 왕위 쟁탈전을 벌리다가 힘이 부쳐 밀려나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로 갔다가 놉이라는 성의 제사장인 아히멜렉으로 가서 몸을 숨기기도 합니다. 또 이 과정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도망다니는 처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다윗이 왕위에 오르거나, 오른 후에 아주 주요한 도구들이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은 마지막으로 다윗의 도망 근거지가 된 아둘람 산채입니다. 바로 그 곳에 있을 때 모여 든 사람들이 다윗의 주력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 22장에 나오는 이 기사를 읽다가 보면 수호지 양산박에 모여 든 송강을 비롯한 108 장수들 이야기가 떠오른답니다.
이야기를 조금 되돌려 보기로 합니다. 다윗이 아둘람 산채로 피신하기 약 이백여년 전 쯤 히브리족이 처음 가나안에 정착하였을 때, 각 지파들은 서로 땅을 분배하고 그 안에서 서로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열였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첫 세대가 지나자마자 각 부족들 간에 힘의 격차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각 부족내에 개별 가족들 사이에도 빈부 격차가 생겨나게 됩니다.
다윗 때 쯤에 이르니 애초 사회 평등의 원칙은 이미 사라졌고, 빈부의 차이는 크게 벌어져 있었고, 떠도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다윗 주변에 몰려 들었고, 그들을 군사화 시켜서 용병으로 만든 것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들을 이끌고 블레셋의 용병이 됩니다.
사울의 부대와 다윗의 부대는 이런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로 거느린 부대의 성격 차이는 바로 사울과 다윗이 생각하고 그린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모습 차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울은 열 두 부족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인 왕국을 꿈꾸었었고, 다윗은 이미 열 두 부족을 넘어선 가나안 전체를 통일하는 왕국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블레셋행은 바로 그 꿈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던 셈입니다.
또한 사울의 군대는 야훼로 부터 받은 힘, 카리스마가 사울에서 빠져나갔다는 소문에 응집력과 전력이 와해 되었지만, 다윗의 부대는 다윗 개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뭉쳐 있었으므로 다윗의 고백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기에 단단한 응집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번 째는 다윗의 여자들입니다.
사울의 둘째 딸 미갈, 갈멜 여인 아비가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 학깃, 아비달, 에글라, 밧세바, 아비삭.
모두 다윗의 아내들 이름입니다.
사무엘상 25장에 기록된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는 과정을 보면, 이런 여러 아내와의 결혼은 바로 다윗왕국의 지경 곧 영토를 확장하는 일과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밧세바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지녔던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성품입니다. 어찌보면 사람들이 지닐 수 있는 여러 성품들을 다 지니고 있었다고해도 큰 탈이 없을 듯 합니다.
다윗의 작품들로 알려진 시편들에서 들어나는 아주 우아하고, 고상하고, 사려깊은 모습들을 따로 이야기 하도록 한다 하여도, 아비가일을 아내로 취하는 모습이나, 밧세바를 취할 때의 모습을 보면 인간적으로 사악하기 그지 없는 것이지요.
북쪽 이스라엘 왕,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멸망하는 과정도 생각하면서 들여다보면 다윗의 교활함이 뛰어나게 드러나는 장면들이 있답니다. 물론 이스보셋이나 북 이스라엘의 총사령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 성서는 다윗이 전혀 몰랐다고 기록하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장면들을 아주 장황히 설명하고 있답니다. 특히 아브넬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다윗은 모든 백성들을 불러 모아 증인으로 삼고 양손을 하나님을 향해 쳐들고 자기는 아브넬의 살인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자기가 명령한 것도 승인한 것도 아니었다고 소리쳤다라고 기록하고 있답니다.)
아무튼 이런 남다른 조건을 지니고 있었던 다윗은 블레셋과 사울 사이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자의반 타의 반으로 벗어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사울과 블레셋 군대 양쪽 모두 결정적인 손실과 타격을 입게됩니다.
다윗은 바로 그 싯점에 슬그머니 그의 용병부대를 이끌고 자기의 고향 유다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무 일도 안했는데 유다 사람들이 다윗을 찾아와 왕으로 삼았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다가 비명에 죽고 난 후(사무엘하 4장) 북쪽 왕국 이스라엘이 저절로 다윗에게 굴러 들어옵니다.
통일왕국을 이룬 다윗은 이제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