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 왕국 4

(당신의 천국 – 스무 번 째 이야기)

“사울은 수천을 치셨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은 이 말이 비위에 거슬려 몹시 화를 내어 투덜 거렸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죽인 공을 돌리고 나에게는 고작 수천 명을 죽인 공밖에 돌리지 않으니 왕의 자리마저 그에게 돌아가겠구나.” (사무엘상 18: 7-8, 공동번역) 

“모든 역사의 경우가 대부분 그렇듯이, 어느 인물을 평가하는 후기의 입장에 대해서도 결국은 결과가 결정해 주었다. 결국 사울의 평가는 다윗이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사울의 업적을 떠나서 다윗의 성공을 생각할 수 없다.”  ㅡ군네벡(Antonius H. J. Gunneweg)이 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주인공들 일테면 조조와 유비 제갈공명이나 관우, 장비, 조자룡, 하후돈, 하우연 손권 등에 대해 어떤 인상들을 가지고 있으신지요? 

하늘이 내린 책략가로 떠오르는 공명이나 착한 이미지로 떠오를 수도 있는 유비, 간사하고 교할한 이미지로 떠 올릴 수도 있는 조조 등등 사람들 사이에 어떤 굳어진 이미지들이 있지요. 

그러나 실제 역사적 사실로 보자면 공명이 했다는 일 가운데 많은 것들이 허구이거나 사실과 다르답니다. 소설의 도입부에 나오는 유비, 관우, 장비가 맺는 도원결의는 소설가 나관중의 상상 속에서 그린 허상이고요. 

조조에 이르면 사실과 다른 것들이 더욱 많답니다. 소설속에서는 나쁜 이미지를 지닌 인물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 역사적 인물 조조는 학문 특히 시에 능한 시인이었고, 서화(書畵)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사람입니다. 학문의 깊이도 남달랐고, 군사와 무예 실력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 인물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서 일하게 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답니다. 그런 탓인지 이즈음에는 성공하려면 조조의 처세술을 배우라는 글들도 종종 눈에 뜨인답니다. 

아무튼 소설과 역사적 사실 사이의 차이지요. 

소설이 아니더라도 실제 똑같은 사실도 보는 관점에 따라 아주 달라지는 경우도 있지요. 

혹시 고려시대 역사에 나오는 묘청(妙淸)의 난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시는지요. 요승(妖僧 – 요망한 중) 묘청이 서경(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대위국(大爲國)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가 토벌된 일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아마 많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그러나 단재 신채호선생은 이 묘청이 일으킨 사건이야말로 한반도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하셨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국에서 전시작전권을 환수해야한다는 축과 그건 종북주의자들이 하는 소리라는 축의 대립이 있지요. 바로 이런 대립의 시초가 고려시대 묘청이 시도했던 서경천도(묘청의 난)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낭불 양가 대 유가의 전쟁이며(郎佛 兩家대 儒家의 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화랑과 불교의 세와 유교의 세력이 맞선 전쟁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전쟁이며(國風派대 漢學派의 戰- 고려의 정신과 중국 종속 정신과의 전쟁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事大黨)의 전쟁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전쟁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이 전역(전쟁)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하였으므로 조선사(朝鮮史)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束縛的)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진전(進展)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선생의 일갈입니다. 

이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고려 정부군의 대장이 김부식이었고, 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고, 이 사건에 대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어느 쪽 시각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것 같으신지요? 어느 쪽 해석이 한반도나 전세계에 퍼져사는 한민족의 미래를 위한 해석이 될까요? 

자! 이쯤 우리들 이야기의 본류인 성서의 사울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이스라엘 첫 왕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읽노라니 삼국지도 생각나고, 묘청의 서경천도 사건에 대한 단재 선생의 글도 생각나고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성서 사무엘상에 나오는 사울 이야기를 읽다보면 사울은 참 불쌍한 사람이랍니다. 화려한 등장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첫 왕이 되었지만, 무수한 전쟁만 치루다가 목이 잘려 나가 효수되는 처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더더구나 세 아들과 함께 말입니다. 

saul

성서에 나오는 사울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울은 야훼 하나님이 예비해 둔 왕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부족 동맹을 상시적으로 위협해 온 블레셋을 비롯한 이스라엘과 철천지 원수였던 아말렉 등 많은 가나안의 적들과 크고 작은 전투와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왕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부족의 총사령관에 가까웠습니다. 초기에 그는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야훼 하나님 앞에 결정적인 죄를 연달아 짓게 되고, 야훼 하나님이 세운 사사(판관)였던 사무엘과 반목을 하게됩니다. 

이 무렵 야훼 하나님의 눈길은 이미 사울을 버리고 다윗에게 꽂혀 다윗을 새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에 불타 정신적으로 여러 불안 증세를 보이다가 끝내 무당을 찾아가 자기의 앞날을 묻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습니다. 

블레셋과의  마지막 대접전이었던 길보아 싸움에서 세 아들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블레셋군은 그의 주검에서 목을 치고 그의 시체는 벳산 성벽에 못박아 달아 놓았다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성서적 고백과 야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요. 

사울은 왕이 된 후 집권 중반부터 다윗과 아주 심한 권력 투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제 이어질 다윗 이야기에서 주로 다룰 일이지만 인물론으로 보자면 사실 다윗보다 사울이 훨씬 잘난 사내이고 성격의 됨됨이도 낫다는 생각입니다. 

사울은 왕이라기 보다는 뛰어난 장수였습니다. 전형적인 무관 스타일입니다. 그에 비해 다윗은 잘 알려졌다시피 시도 잘 쓰고 악기도 잘 다루는 등 가무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변신도 밥 먹듯이하는 아주 교활한 성격이었으며, 때론 탐욕스럽기도 한 마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나쁜 이미지의 조조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이기고 왕위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들이 그 왕위를 이어나갔고요. 역사는 다윗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말이랍니다. 그렇다면 실제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성서의 기록이 억울할 수도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되는 것이지요. 

자! 여기서 성서적 고백 곧 야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들의 천국을 위해서 말입니다. 

성서가 기록한 사울의 죄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왜 사울에게 얼굴을 돌리고 그를 버리기로 결정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사울의 죄는 저 위에서 말한 무당을 찾아갔던 일 말고도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직분과 왕의 직분이 엄격히 분리된 약속을 범한 죄입니다. 전쟁을 치루기 전에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사사인 사무엘의 몫인데 그 일을 사울이 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3장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의 결정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답니다. 

둘째는 아말렉과의 전쟁을 치루고 난 뒤에 벌어진 일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 전쟁을 치루기 전 사울에게 명령을 내렸답니다. 아말렉족을 싹 죽여 없애고, 모든 재물도 태워 없애라는 명령이었답니다. 

사울은 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 왕인 아간과 양과 소 등의 재물들을 죽이지 않고 탈취를 한 죄입니다. 

이 역시 인간적으로 보면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무엘이 이런 사울의 행태를 보고 나무랄 때 보인 사울의 태도입니다. 그는 야훼의 명령을 어긴 일에 대해 묻는 사무엘에게  자신의 군대와 야훼를 위한 제사용이었다는 변명을 한 것입니다. 뒤늦게 그는 후회하며 용서를 빌지만 이미 때는 늦은 일이었습니다. 

이 세가지가 성서가 말하는 사울의 죄입니다. 그 유명한 성서 구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사무엘상 15 : 22, 표준 새번역 개정판)라는 대목이 나오는 장면입니다. 

성서와 이스라엘이 사울왕의 생을 놓고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물론 제 생각일 뿐입니다. 

첫째 세상의 그 어떤 권력도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주관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권력은 신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고백이라는 말입니다. 

두번째는 이스라엘족들의 민족적 신앙고백인 야훼 신앙에 영향을 끼칠 외부의 것들은 애초 싹을 자르는 철저한 경계를 두자는 고백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이제 이야기가 이어질 다윗과 사울의 결정적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 이스라엘의 메시아 원형인 다윗과 저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구원자 예수 사이를 잇는 다리인 바로 “회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