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년이 바로 어제 같은 벗들

시간 단위로 살던 삶인데 환경이 바뀌니 아직 익숙칠 않습니다. 계획보다는 모든 일들이 더디 가고 있답니다.

 

아무튼 그런, 아직은 낯선 아침들을 맞고 있답니다. 그리고 어제 아침이었습니다. 8시경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한국 분인데….” 전화기를 건네며 아내가 하는 말이었습니다.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저… 김영근….”,  “혹시, 김영근 맞스… 맞니?”

 

도대체 누군지 감을 잡지 못해 뭐라 대답하기가 참 애매했답니다.

그래 던진 말이 “근데….”였답니다.

청운중학교 

“너 영근이구나! 나 길환이야! 오길환! 청운중학교! 나 알지?”

“어… 오길환이! 니가 어떻게?”하는 제 대답과 동시에 우리들은 사십년 저 쪽 세월로 날아가 있었답니다.

 

대뜸 사십년 전으로 돌아간 친구의 목소리였습니다.

“XX, 오랜만이다!”

그리고 제 대답이었습니다.

“XX, 진짜 오랜만이다!”

 

그렇게 이어진 통화는 인규로 영환이로 그렇게 사십년 전 친구들의 목소리로 이어졌습니다.

그 시간이 한국시간으로는 밤 9시쯤이었던 모양입니다.

 

올해 환갑을 맞는 중학교 동창들이 모처럼 모여 저녁식사와 반주를 곁들이는 모임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찌하다가 제 이름이 나왔고 그 중 한 친구가 마침 제 전화번화를 갖고 있어서 전화를 하게 되었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지가 60년대 말이니 사십 수 년이 지났습니다.

 

어제, 오늘 복에 겨운 날들을 보냈답니다.

 

세상에 누군가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저를 기억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복이지요. 사십년 전의 친구를  기억하고 전화를 돌릴 수 있는 친구들이 어제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제겐 진짜 복에 겨운 일이었답니다.

 

어제 불알친구 길환이가 제게 던진 질문이랍니다.

“영근아! 니 고추 아직도 하야냐?”

“그럼, 여전히 희지!”

 

추억은 때론 내일의 힘이 됩니다.

 

벗들과 저의 노년을 위하여!

 

살아있는 하루의 기쁨

모처럼 글을 쓸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바쁘기도 하였거니와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를 담을 형편이 아니었답니다.

 

오늘은 제 세탁소의 오래된 단골 손님인 Jim McKelvey 의 글을 소개 드립니다.

 

이제는 은퇴한 치과의사랍니다.

 

jim mckelvey

 제 가게에 들어설 때 마다 “오늘 하루를기쁘게 살고, 웃음을 이웃과 나누는 일이 바로 세상을 밝게 하는 일이다”라는 주제로 그가 매주 만드는 명함 하나를 건넨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진들이 그의 명함이랍니다.

 

그리고 제가 주일 아침이면 보내는 이메일 편지의열렬 독자이기도 하고, 그가 똑같이 그의 “일상에서의 기쁨을 나누는 이야기들”을 보내는 멤버의 한 사람으로 저를 선택해 준 덕분에 그의 이야기들에 늘 귀를 기울이는 기쁨을 누리고 있답니다.

 

다음은 엊그제 그가 칠순 생일을 보내며 느낀일들을 잔잔히 기록한 편지랍니다.

 

그 이의 허락을 얻어 제 블로그에 번역해올려봅니다.

 

“살아있는 하루의 기쁨” – 함께 나눕니다.

 

Jim McKelvey의 글입니다,

 

< 일흔을 맞으며…

 

지난달 일흔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노래하고, 소원을 빌며, 촛불을 불어끄는 그러한 성대한 생일잔치가 아니었다.

 

하루 저녁에는 저녁식사 후 촛불 하나를 얹은 컵케익이 전부였고, 그리고서는 먼 친지를 방문하여 또 다시 촛불 얹은 컵케익으로 생일을 축하했다. 또 다른 날에는 누이와 함께 점심을 들면서 조용히 생일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나서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촛불과 컵케익 없이 뉴욕에서 이틀을 보냈다. 이렇게 생일 축하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로,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다면, 생일은 그 날에 대해 감사하는 단지 또 다른 하루, 또 다른 멋지고 경이로운 하루일 뿐이다. 1997년, 나는 과연 55회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한 병을 앓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생의 일흔 한 번째 해에 들어서고 있다.

 

이전에 말했을 지도 모르지만, 그 때 부터 나는 “매일매일이 신의 선물이다”라는 말의 진리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15년 동안을 통하여, 나는 하루하루의 가치와 삶의 소중함을 되풀이해서 배워 오고 있다. 내 병이 위대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내가 깨달은 것은 그것 뿐이 아니다. 내 병만이 유일한 스승이 아니었다. 지난 11월 이러한 글을 쓰면서, 매일매일 내 삶을 스쳐가는 스승들에게 알렸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학생이 되는 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그것이 이 메세지를 받는 사람들, 이 “공유 모임”으로 이끌었다.

 

당신 모두가 이 수많은 해를 거치면서 어느 순간 나의 스승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어렸을 때 “Please”와 “Thank you”라는 말을 하도록 나에게 가르쳐준 나의 누이일 지도 모른다. 혹은 캐롤과 내가 처음 결혼하고 보살펴주었을 때 10대 소녀로서 내게 인내를 가르쳐 준 사랑하는 내 처제일 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중 일부는 내가 수강을 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들은 세상에 나가는 새롭고 더 나은 방법을 내가 알도록 도와주신 카운슬러요, 강사요, 치료사 (therapist) 이었다. 더러는 치과의사로서 내 평생직업에 대한 시야를 넓혀준 동료 전문가였다. 또한 내게 힘을 주는 그리고 너그럽게 보내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저술가였다.

 

아마도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려운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용기와 불굴의 인내를 배웠을 것이다. 당신의 예를 보면서 관용을 배웠을 지도 모른다. 당신들 중 어떤 이들은 “자, 해봐, 힘내!”라는 말 혹은 행동으로 나를 격려했다. 당신에게서 봄으로써 나는 용서의 힘을 배웠다. 당신 신앙의 힘을 보면서 무언가를 얻게 되었다. 나는 당신의 연민을 경험하고 나 자신의 연민을 강화했다.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 직면하고서도 당신이 의연하고 심지어 영웅적인 것을 보았다.

 

당신 중 상당 수는 내가 치과 의사로 일하면서 내 환자였거나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다. 당신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당신의 삶의 이야기, 힘, 고결함, 이기심없는 심정, 창조력, 좋은 유모어를 배웠다. 그렇다, 우리는 함께 웃었고, 또한 그것으로 부터 배웠다.

 

이 메세지를 받는다면, 당신은 이 경이로운 여정 중 어느 순간, 어떤 식으로든 나의 스승이 되었다. 감사한다. 나의 인생여정은 당신이 있으므로 해서 풍요로워졌다.

 

이렇게 나의 스승목록을 만들면서, “지금 어떻게 지내나?” “잘 지내고 있나?” “당신은 여전히 천부의 재능을 세상에서 발휘하고 있는가?” “가족들은 어떤가?” “당신은 내게 어떻게 스승이 되었는지 아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보다 나은 세상을 기원하며,

 

Jim,

Dr. Jim,

Jimbo,

Poppy

……….우리 서로의 관계에 의존하는

 

또래의 고민들

화창한 초여름 날씨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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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보내기 아주 좋은 날이었지요. 

햇살은 조금 따갑게 느껴졌지만 이따금 장미 향기를 품고 건듯 부는 바람이 그 따가움을 실어가는 오후였답니다. 

야외결혼식에 안성맞춤인 주일 오후를 택한 신랑, 신부 애들의 안목이 대단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오랜 이 동네 벗이 아들을 장가 보내는 날이었답니다. 

모처럼 만난 얼굴들과 함께 새 가정을 꾸미는 아이들과 두 아이들을 키운 가정을 축복하는 마음들을 나누며 즐거운 주일 오후 한 때를 보냈답니다. 

모든 모임이 그렇듯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이지요. 

이제 곧 맞이 하게 될 자기 아이들의 결혼 이야기, 부모 또는부 나 모의 건강 이야기, 그리고 곧 맞이 할 은퇴 이야기 등등. 

무릇 사는 맛이 사람마다 다를 일이지만 또래의 고민들을 또래에 맞게 하고 사는 삶도 축복 받은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주일 밤이랍니다.

1과 99 사이

두 사람의 생각이 서로간에 100% 딱 맞아 떨어질 수 있을까요?  아마 100% 없을겝니다. 만일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건 어느 한쪽의 힘이 100%일 경우이겠지요. 그러니까 생각이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쪽의 힘이 0여서 100%의 힘을 갖고 있는 쪽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경우일 뿐이겠지요.

그렇지 않을까요? 

무릇 사람사이의 의견이라는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걸 어느만큼 인정하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성장도를 가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SkyEarthMan

0과 100으로 나누이는 사회란 사람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씀입지요. 

그런데 이런 사회를 흔히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뉴스”같답니다. 

특히 종교, 정치, 남북 뉴스 에서 말입니다. 

무릇 0과 100으로 나누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답니다. 

다 썩은듯한 우리나라(미국)도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랍니다. 

우리나라(미국) 그러니 “뭐, 이런 놈이 있나?”하는 분들도 계실겝니다. 

제가 존경하는 장광선선생(대단한 양반 아니고요. 그냥 저처럼 세탁소하신답니다.)께서 가르쳐 주신 거랍니다. 

“내가 사는 곳은 ‘우리 집’입니다. 내가 밤이면 늘 편히 잠을 자는 곳입니다. 우리 집이 있는 곳이 바로 ‘우리 동네’입니다. 내 이웃들이지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 나라’지요. 바로 미국입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계 이민들이 여기서 헷갈립니다. 아직도 ‘우리나라’가 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 

자! 이쯤.

열린 맘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무릇 열린 맘의 첫 걸음은 0과 100이 아니라 1과 99 사이에서 서로가 맘껏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