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愛國)에

재작년 아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뜬 Russell W. Peterson은 DuPont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고 1970대초 공화당원으로 내가 살고있는 델라웨어 주지사를 역임한 바 있다. 그는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동시에 시민운동가이며 환경론자이다. 오랜 공화당원 생활을 접고 민주당원으로 그가 당적을 바꾼 것은 1996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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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여든 셋에 백 쪽도 채 안 되는 작은 책자를 출간하며 제목을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Patriots, Stand Up!)”>라고 하였다.

 

책의 제목만큼이나 책의 내용이 직정(直情)적이다. 당시 부시행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과 독설, 그리고 애국민임을 자처하는 미국인들에 보내는 그의 충언을 읽으면 그가 팔순 노인은 커녕 스무 살 팔팔한 젊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그는 9.11참사 이후 불어닥친 미국내의 애국주의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뚤어진 애국심과 애국주의의 선동으로 미국은 처음 국가를 건설하며 꿈꾸었던 참되고 큰 미국정신을 잃어 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선두에 부시행정부로 대변되는 극우 보수 공화당원들이 앞장서고 있다고 비난한다. 부시행정부가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내걸었던 전쟁의 당위성 일곱 가지들 일테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알 카에다 조직과의 연계, 우라늄생산을 위한 시설 보유, 독가스로 수천 명의 인명 살상, 우라늄의 대량 유입, 생화학 무기 생산을 위한 연구 시설 보유, 미국의 안전 위협 등의 모든 전쟁 이유들은 단지 구실이었을 뿐 모두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참다운 애국주의의 개념을 바로 세워야 할 때이며, 생각있는 미국인들이 이 운동에 앞장 설 것을 주문한다. 그는 진정한 애국심과 애국주의는 미국의 첫 정신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주창한다.

 

들어라! 선조들이 어렵게 지켜온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 곧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생활 양식을 버리라고 주문하는 오늘날 극단주의 지도자들을 향해 이 미국이 울고 있는 통곡의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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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러쎌은 주창한다.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 수 세대 동안 싸워 이룩한 이 위대한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법 아래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이 땅의 삶을 위하여! 전 세계 민중들의 꿈을 집중시켰던 식민주의, 노예제도, 파시즘,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통해 이룩해온 이 땅을 위해! U.N.헌장과 권리장전,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우리들의 기본적 권리들을 위해! 궐기하라!”

 

팔순 노인이 치켜든 열정적 반 부시의 깃발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민의 거의 반수는 부시행정부의 지지층들이었다.

 

애국의 길은 생각에 따라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가는 길이 다를 수도 있다.

다만 함께 공유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 곧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아래 상식적인 보편의 가치의 기반 위에 서서 부르짖는 애국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기반을 상실한 채 애국을 호도하는 세력은 타도의 대상이며 실로 애국자들이 궐기해야만 하는 세상인 것이다.

 

어찌 미국 뿐이랴!

보편 상식적인 가치를 따져 애국을 논해야만 한다.

 

밥이 된 사내 이야기 10

성서는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곧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를 하기 전, 예수가 사탄에 이끌리어 세 가지의 시험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돌로 밥이 되게 하라”, “기적을 보여라, 신이 너를 지키리니…”, “나를 경배하라, 세상을 네게 주리라” 하는 세 가지 시험 말이다.

이것은 바로 당시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던 유대 민중들이 원했던 절실한 바램을 해결해 줄 세가지의 열쇠이었다. 경제, 정치, 종교적 압제에서의 해방을 이루어줄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시작부터 “아니오”였다.

당시의 민중들이 바라는 해결책을 처음부터 “아니오”하며 그들 앞에 선 사람이 예수였다.  갈릴리 해변에 모여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예수와 듣는 사람들의 생각이 처음부터 달랐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까닭이다.  예수는 당시 갈릴리 사람들처럼 밥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그런데 밥을 바라보는 예수와 듣는 청중 사이에 간격이 있었고,  그 간격 때문에 예수가 죽는다는 말이다.

밥의 문제 때문에 이야기를 들으려 온 사람들의 관심은 제 배 채우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나누는 밥”을 말하였던 것이다. 있는 분, 없는 놈이 예수의 관심이 아니었다.

성서를 다 인용할 수가 없다. 만일 관심이 있는 분들은 지금 성서를 찾아 읽어 보라. 신약성서 누가복음 14장 12절에서 24절까지이다. 얼핏 읽으면 부자에 대한 피해 망상적인 기피증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일방적 편애가 나타난 것 같지만 “아니다”이다.

밥의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대응을 예수는 우선 피력하였고 예수의 관심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잔치상에 모든 이들을 초대한다. 있는 놈, 없는 분을 가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도 나온다. 누가는 어떤 사람이 잔치를 열었다고 하였고 마태는 왕이 잔치를 열었다고 기록한다. 어쨋거나 많은 사람들을 초대한다.

먼저 초청을 받은 이들은 그들의 가진 것 때문에 이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 화가 난 주인은 가난한 자, 불구자, 소경, 절뚝발이는 물론이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불러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한다. 잔치상이 무엇인가? 나누어 먹는 것이다. 이 나누어 먹는 잔치상을 차려 놓은 것은 주인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초대한 주인은 애초 어떤 편파성을 띄고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나누어 먹는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잔치상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밥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끝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밥을 나누는 나라인 것이다. 시인 김지하는 예수가 말한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감을 얻어 “밥이 하늘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로 오 천명을 먹이고도 남았다는 기적은 무엇을 말함인가? 나누어 먹는 밥상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다. (김지하 이야기 나왔으니 한마디 하고 갈까. 그가 ‘밥이 하늘이다’고 선언했을당시만 하여도 그는 맨정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 ‘나누어 먹는 하늘’이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던가? 그도 제 배가 고팠을 터이고… 선언이 아뿔사였겠지. 그를 탓할 일 없다. 느끼고 깨달으면 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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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쉬우리라”고 가히 혁명적 선언을 한 예수의 참 뜻은 바로 나누어 먹는 밥상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이 결코 자랑일 수 없으며 부를 누리는 것이 결코 죄가 될 수 없다. 부와 가난의 본질 곧 나누는 밥상 정신이 있고 없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며 살았다고 자부하는 부자청년이 “영생의 길”의 길을 묻자 그에게 한 대답 아니 명령은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갈파한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 내용이다. 나누는 밥 말이다. (나누는 형식에 대한 고민은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질 터이고, 비록 돌고 돌며 때론 뒷걸음치는 것같지만 그래도 공평한 방법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이 있는 이들에 의해 역사는 발전해 나갈 것이다.)

두 번째는 “기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을 누리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곳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누어 먹는 곳”이라는 말은 아주 현실적 표현이다. 나중에, 뒤에 가서, 그 날에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누어 먹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웠다”

 

 

***오늘의 사족

오병이어 곧 물고기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 그거 한 번 생각해 보자.

오천 명이 있었다. 애들과 여자는 빼고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종교적 모임 그러면 당연히 여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 거기 얼마나 있었을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만 명은 넘었었겠지. 글쎄 그 당시 인구로 이게 가능했을까? 믿자. 믿음인고로.

그러나 그 광야에 그렇게 나 온 이들 가운데 먹을 거 가지고 온 사람이 달랑 한 가족 뿐이였을까? 그건 아니였겠지. 딱 자기들만 먹으려고 짱 박고 있었겠지. 움켜 쥐고 있었겠지. 나와 내 가족들 배채우는 게 우선있을 터이니…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다. 기적은 있다. 나누려는 맘이 바로 기적의 씨앗이었다. 예수의 기적은 마음에서 시작된 일 아닐까?

열 두 광주리 남은 이야기는 이 글의 이부(가슴으로 만난 예수 이야기)에서 이어가려 한다.

 

 

오만 잡생각

오만 잡생각”

이런 저런 걱정거리나 머리가 복잡할 때 종종 쓰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오만 잡생각”이라는 말엔 아주 과학적인 근거가 있더군요. 아주 재미있는 연구결과를 하나 말씀드리지요.

 

National Science Foundation(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연구 결과랍니다.

 

사람은 보통 한 시간당 천 개가 넘는 생각을 한답니다. 물론 생각의 편린 곧 생각의 조각들(fragments)의 숫자이지요.  지금 저처럼 어떤 글을 쓰고 있는 상태에서는 시간당 약 2천 5백가지가 넘는 생각들을 한다고 하네요.  보통사람들은 하루에  일만 이천개 정도의 생각을 하며 살고요. 생각을 좀 많이 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약 5만개의 생각을 하며 산다고 하지요.

 

참 우리 선조들은 연구하지 않아도  다 아시고  “오만 잡생각”이라고 하셨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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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지요. 보통 사람들은 하루에 5만에서 6만가지 생각을 하며 산다고요. 그런데 그의 연구에 따르면 그 오만 잡생각 가운데 15% 정도는 긍정적인 생각들이고 나머지 85%가 부정적인 생각들이랍니다. 일테면 걱정, 근심, 불안 등등과 연관된 생각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지요. 

 

이게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당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젠가 고 김대중대통령의 마지막 일기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를 죽 읽다가 저를 사로잡은 것은 2월 7일에 쓰신 단 두 문장으로 된 일기였답니다.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제가 감히 거기에 무슨 사족을 달겠습니까? 그냥 가슴이 싸하게 다가 온 말씀이었지요.

 

그 분도,  아니 그 분은 저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많은 생각을 하시며 사신 분이지요. 어쩌면 하루에 5만, 6만이 아니라 10만, 20만 아니 그 이상의 생각들을 하시며 사셨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하루를 보내고 그 날의 일기에 달랑 저렇게 두 문장으로 정리해 놓으신 것을 보면 누리셨던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이지요.

 

일기를 다 읽고 제 마음에 든 생각 하나. “참으로 그 분은 긍정의 힘으로 사신 분이구나” 이거였답니다.

 

장사 – 역시 긍정의 힘이 이끌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의 하루 하루를 15%의 긍정적 생각들이 이끌고 가게해야 합니다. 긍정적 생각들이란 지푸라기라도 잡는 어떤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는 그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생각들을 참 그 방향으로 나가게 하려면 철저하게 준비하고 실천하는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 분이 살아 온 길이 바로 그렇게 “준비”하고 “실천”하는 삶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큰  사람만이 그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작은 구멍가게 하나 잘 꾸려 나가는 일도 마찬가지겠지요.

 

장사 안 되어서 걱정”, “이거 진짜 큰일”, “아이고 어쩌지” 그 부정적 생각들을 머리 흔들어 떨쳐 버리고, “이건 내게 좋은 기회야”, “그래, 이거 하나 바꾸어 보자”, “이렇게 다시 시작해 볼까” 긍정적 생각들로 아주 작은 것부터 준비하고 행동으로 옮겨 보는 일.

 

어떠세요?

한 번들 함께 해 보시지 않으시려는지요?

 

 

실행하는 사람

<역사는 나선형으로 진행한다. 한 시대가 그 전 시대로, 또는 그 전의 문제로 되돌아가곤 한다는 뜻이다포도주 병의 코르크 마개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역사도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듯 하지만 사실은 수준이 점점 올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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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또는 비지네스맨의 영원한 멘토라고 불리우는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의 말입니다. 어떤 하나의 현상을 보면 마치 역사가 뒷걸음치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발전한다는 것이지요.

인생을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의 개인사나, 조직의 역동성을 굳게 믿는 단체나 크거나 작은 기업사, 민족의 역량에 대한 신뢰를 가진 민족사 나아가 인류 보편의 자유를 신봉하며 나아가는 세계사는 발전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겠지요.

<실행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한다. 물론 자신이 하는 일 전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모든 사람은 아주 많은 일상적인 일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매일 3시간씩 연습을 한다. 아무도 그가 연습을 좋아한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해야만 하는 것이다. 재미가 없을지라도 40살 이후에도 실력을 향상 시키려면 그것을 즐겨야 한다나는 몇 년 전 한 피아니스트에게서 “나는 내 손가락에 생명이 있는 한 연습을 한다”는 훌륭한 말을 들었다.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연습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피터 드러커가 그의 책 ‘경영 바이블’에서 한 말입니다.

무릇 직업적인 일이란 대부분 아주 단조로운 일상의 연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즐길수 있어야합니다. 그 삶이 아름답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발전을 위해서 말이지요.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이른 아침

버섯공장 거름냄새

앞뜰

파랗게 물오른 버드나무 아래

차마

견뎌내지 못하고 떨어진 잔가지들

뒤뜰

흐드러진 개나리 사이

겨우내

숨 져 마른 관목

아래

볼품없이 누워있는

내 머리만한

돌멩이 하나

 

봄엔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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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예수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듯 부활도 끝이 아닙니다. 문제는 부활이후(以後)입니다. 탐스런 목련, 뒷뜰에  흐드러진 서울 개나리, 하얀 배꽃, 날렵한 더그우드 꽃잎들… 봄 꽃으로 꽉찬 세상만이 봄이 아닙니다.

제 딸년이 코끝에 사래질 치는 버섯공장 거름냄새도 주워 내다 버려야 할 떨어진 버드나무 잔가지들도 앙상히 말라 톱질 기다리는 죽은 나무도 일 년 내내 그 자리에 있어도 눈길 한 번 주어 본 적 없는 못생긴 돌덩어리도 봄입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 한 자리 꿈꾸었던 제자들…

부활이후에도 여전히 한자리 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첫 증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여인이었다는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베드로는 바울에게 밀려 났고, 야고보, 요한 역시 한 자리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울은 뭐 크게 출세했나요. 발품 팔아 돌아 다니며 멍석 짜는 일에서 벗어 나지 못한 삶이었지요. 봄은 그렇게 오는 것이지요. 부활 이후 말입니다.

“위로자로서

화의 축원자로서

삶의 조언자로서…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