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된 사내 이야기 12

다시 성서로 돌아가 보자.

마가복음 4장 30-32에는 이른바 “겨자씨의 비유”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4장 26-29절에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가 마태복음 13장 33절에는 “누룩의 비유”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말속에 집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늘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 :33)”는 말을 세상을 확 바뀌는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만 겨자씨의 비유나 자라나는 씨의 비유처럼 나는 서서히 변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 본질 밀가루가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 이야기들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할 일과 하나님의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 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 나는지 모른다(마가 4: 26-27)” 사람이 할 일은 씨를 뿌리는 일이다. 그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가는 과정이란 말이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핵심적 이해는 바로 이것이다. 땅에 씨를 뿌리는 것, 가루에 누룩을 섞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할 일이다. 그리고 씨를 심는 땅, 누룩을 받는 가루는 역사이며 현실이다.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자라고 부풀리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확 바뀌는 어떤 것이 아니라 비록 지금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만질 수는 없어도 역사 안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 나라는 이 천년 전 예수가 서서 말하였던 갈릴리에서부터 오늘 여기까지 지속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곳이며 이 일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초청받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를 죽음으로 이끌어 간 (아니 어쩌면 그 스스로 이끌려 간) 사람들의 하나님 나라의 이해는 지금 오늘도 곳곳에서 일어 나고 있다. 그를 또 다시 죽음으로 몰고 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자꾸  뒤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또 어려워졌다. 쉬운 이야기 하나 하자.

 언젠가 “아버지 학교”를 다녀 온 후배가 한 말이다. “제가 확 바뀌었습니다. 기쁘게 살자는 것이죠. 우선 화를 내지 말자. 말의 높이를 낮추자. 성내는 마음을 죽이자. 그렇게 하고 나니 우리 가정이 확실히 바뀌었습니다. 가정이 천국이 되어 갑니다.”

자, 그의 표현대로 그가 확 바뀌었다치자. 그의 가정은 아버지학교를 다녀오기 전이나 다녀 온 후나 구성원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 가정이 천국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먼 곳이 아니다.

기쁨과 나누어 먹는 밥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마침내 말로써가 아니라 그의 온 몸을 던진 증언으로 우리 앞에 다가 온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다가 서는 것이다. 더불어 나누어 먹는 본을 보이며 마침내 그의 몸을 나누는 밥으로 내어 놓은 역사적인 장면 그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untitled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 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가 14: 22)” 이 때가 유월절이라고 하였다. 죽기 직전에 마지막 식탁, 그는 나누는 밥상을 온 몸으로 보여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누는 밥상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사족(蛇足)처럼 한 마디 달자. 이즈음 차고 넘치는 교인들의 “나 하나만” 또는 “내 가정만” 아니면 “내 교회만”하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주 다른 곳이다. 물론 나도 그 한 가운데 서 있다.

기쁨에 대한 예수의 실체적인 증언 그것은 바로 부활이다.

“젊은이는 그들에게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사렛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 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 하신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 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하였다.(마가 16: 6-7)”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번역된 ‘에게이로’라는 본래의 말 뜻은 <일어나다> 또는 <궐기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캄캄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일어난, 다시 궐기한 예수는 갈릴리로 그의 삶의 현장이었던 갈릴리로 먼저 향했다. 기쁨은 바로 이것이다. “기쁜 소식” 곧 복음 – 예수가 살아 복음이 되어 오늘 여기 우리들의 갈릴리에서 기쁨으로 일한다는 성서의 증언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를 죽였던 무리들, 그를 따르다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함께 하였던 추종자들은 오늘도 살아 있다. 그들은 어떤 이들 이었을까?

***오늘의 사족

‘아버지 학교’를 통해 확 바뀌었다는 후배는 세월이 흘러 바뀌기 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에게이로’ – 일어나라! 궐기하라! 그게 아직도 누구에게나 유효한 까닭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