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로는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은 “기쁨”이다.
몇 군데 성서를 찾아 읽어 보자.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 44, 이하 공동번역 성서)”,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누가 15: 7)”,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누가 15: 9-10)”,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누가 15: 32)” 긴 이야기를 다 인용하지 못하였다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명하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나는 “기쁨”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기쁨”이란 것이 죽어 저 세상에 가서 누리는 것이거나 막연하게 생각속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전과 지금의 바뀐 상황에서 누리는 기쁨이라는 말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 잃었던 것을 되찾은 현실, 집 나가갔던 아들의 돌아옴같이 이전과는 다른 어떤 현실 속에서 맛보는 기쁨이다.
예수는 이 천년 전 갈릴리 사람들을 향해 말하였다. 나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곳이요”라는 설명이 필요 없는 공동의 사전 이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며 오기를 고대하였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차이 때문에 예수는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고도 하였다. 바로 이 기쁨에 대한 이해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따랐던 추종자들이나 예수와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어찌 보면 좀 황당한 이야기였다.
먼저 예수를 따랐던 이들의 입장에서 예수를 바라 보자.
“우리를 위하여 태어 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이사야 9: 5-6)”
이 염원은 갈리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유대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표상이다. 그들의 기대는 분명 로마 압제에서의 해방, 로마의 앞잡이 노릇하던 예루살렘 성전체제와 헤롯왕국의 변혁이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다윗 왕권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대신한 구세주가 통치하는 세상을 바랐던 것이다. 그들이 누리는 기쁨이란 바로 그런 나라에서 사는 것이었고 예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따랐다.
예수를 적대시했던 이들의 눈에도 예수는 분명코 무슨 일을 내고야 말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마태 11: 19)” 먹고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가 어울려 다니는 무리들이 문제였다. 먹고 마시되 체제 안에 사람들과 하는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무리와 어울려 먹고 마시고 나누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분명 체제 전복을 노리는 세력 바로 중심이었다.
예수가 말한 상황이 바뀐 곳에서 맛보는 기쁨에 대한 이해는 듣는 이들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섰다. 추종자들에게는 확 바뀐 현실이 곧 다가 올 것이고 그 중심에 예수가 있고 기쁨은 그들의 몫이 된다는 것이었으며, 적대자들에게는 체제 전복의 언어로 다가 선 것이다. 그러다 이들의 이해는 한 곳에서 만난다. 추종자들은 어느새 실망하고 분노한 군중으로 변하고 적대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예수의 죽음이다. 무엇이었을까? “기쁨”을 말하였던 예수가 왜 “기쁨”을 고대하였던 당시의 사람들의 함성과 손에 죽게 되었을까?
나는 “확 바뀌는 세상”과 “꾸준히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바뀌는 세상”의 차이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의 첫 선포는 매우 다급하고 급박한 표현으로 선언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바로 지금 눈 앞에 다가 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상은 확 바뀌는 혁명적 세상이 아니다. 바로 이 차이다. 사람들은 당장 맛 보아야할 기쁨, 확 바뀌는 세상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나라를 말하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