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Go)!

참 제 앞가림도 변변히 하지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이 넓어서 이것 저것 생각만 많은 사람입니다만, 이 땅을 이민으로 살면서 고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회”이지요.

참으로 많은 긍정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인 이민들 앞날에 장애물 아니면 애물단지가 바로 이 교회라는 생각에 허풍 조금 보태면 잠 못 이루는 그런 날이 제법 있었다고 말씀 드릴 수도 있겠습니다.

뭐 긴 말씀 드릴 요량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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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자 이야기는 예수의 이런 말씀으로 끝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표준 새번역 개정판)

“Neither do I condemned you; go and sin no more”(New King James Version)

이 구절에 대한 성서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자면 꽤 긴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우선 Go 다음에 나오는 “sin no more”라는 말,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말은 후대 첨가구라는 것이 것이고 예수가 한 원형적 말은 “go” 곧 “가라”라는 말씀으로 끝났다는 것이지요.

근데 어디로 갑니까? 집으로 가는 것이지요. 간음한 여자는 죄인이었습니다. 예수 당시에 병든 사람도 다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는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셨지요. 죄인의 죄를 씻겼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때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가라(go)”입니다.

어디로 가라는 것일까요? 

가족에게로, 일상으로, 평범한 생활 가운데로, 이웃에게로 돌아감입니다. 아니 그 곳으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성서에 다음 구절들이 다 그런 말씀들입니다.(마가복음 1장 44절, 2장 11절, 5장 19절,34절, 8장 26절, 10장 52절 누가복음 7장 15절, 17장 19절 요한복음 5장 9절, 9장 7절, 11장 44절등등)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 당시에 죄인들(병든 자를 비롯한 사회 하부계층 –쯧쯧, 이렇게 표현하면 좌파가 되겠고- 일테면 소외받은 자들 이라고 할까요- 그것도 좌파?)은 일상사에 있어서 “남들처럼 대접받지 못하는”부류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돌아가라”는 이른바 귀환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맹점이랄까 아님 이민교회의 부정적 측면이랄까 그런 것이 드러나는 까닭은 바로 이 “귀환명령”, “돌아가라”, “가라”하는 명령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기 얽매여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이웃으로, 일상으로 돌아가 떳떳하게(신앞에서) 하루하루를 살 수 있도록하는 원천이 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 얽매는 곳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찰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청정도량(淸淨道場)이란 바로 삶, 곧 일상을 위한 곳입니다.

곰곰 생각해 보십시요. 이즈음 교회나 사찰(사찰에 대한 부분은 깊이 천착한 바 없습니다만. 이민의 땅에서 말입니다.) 들이  얼마나 이민들을 얽매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펴낸 조선통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행여 오해가 있을까보아 말씀드립니다만 이건 대한민국 오월출판사에서 펴낸 책으로 뉴욕의 어느 서점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거기 옛날 삼한시대의 “소도(蘇塗)”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있더군요.

“<삼국지> 위지 마한전에는 마한 사람들이 ‘도둑질’하고는 도망쳐 ‘소도’라고 부르는 종교행사를 진행하는 곳으로 들어 갔는데 거기에서는 그들을 돌려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중략- 도망쳐 온 인민들에게 종교를 초계급적인 것으로 미화함으로써 그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한편 저들의 노예로 부리기 위해 돌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계급의식”이라는 말이 좀 걸리기는 합니다만 어쩌면 예수의 “가라”라는 말은 소도라는 종교적, 사회적 제약을 깨고 어느 곳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는 명령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지요.

오늘날 “이민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명령 ”가라”하는 말씀을 전혀 귀 담아 듣지 않는 까닭에서 오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라는 말씀이지요.

믿음이란 무릇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소도”에 머물 일이 아닙니다. “가야”합니다. 몸만이 나니라 생각과 정신과 맘이 “오늘, 내 삶의 현장에 있어야”겠지요.

아 참! 예수는 “나를 따르라”<follow me>”를 주창하기도 하셨지요. 그건 또 나중에 말씀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