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철 들까?

이순(耳順) 나이에 이르르면 매사 넉넉히 듣는다던데, 쉽게 발끈하여 속내를 드러내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性情)은  고칠 수 없는 병인듯 합니다. 어제, 오늘 아내의 이어지는 잔소리를 ‘허허’웃으며 감내하는 까닭은 제 고질병을 익히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위한답시고 올들어 몇 번 참석한 모임에서 일어난 일이랍니다. 어느 해부터인가 제가 피하는 자리가 있답니다. 정치 이야기, 종교 또는 믿음 이야기를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이들과 나누어야 하거나, 또는 익히 잘 아는 사람들이지만 저와 성향이 다른 이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때  애초 자리를 피하거니와, 마지못한 자리라도 슬그머니 피하곤 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올들어 몇 번 아내와 함께 참석했지만 그 때마다 후회를 안고 돌아 온 자리였답니다. 끝내 제 병이 도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사연인즉  <‘하나님의 사람’과 ‘보통  나 같은 사람(제가 아니고  말을 하던 화자랍니다)’과는 확연한 어떤 차이가 있어서 비교 불가하고 그렇게 될 가능(하나님의 사람)이 ‘나같은 사람(화자)’에겐 없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만 제가 발끈해 버렸다는 이야기랍니다.

그  이야기를 하신 분은 중절모가 정말 잘 어울리는 멋진 노년이시랍니다. 이순(耳順)을 훌쩍 넘기시고  칠순을 바라보시며 조곤조곤 삶을 즐기며 정리해 주시는 이야기들이 썩 매료되는 멋진 양반이시랍니다.

그런데 그만 그런 양반의 이야기 허리를 뚝 끊고 “그건 아니오!”라고 선언을 해 버렸으니 아내의 걱정이 이틀이나 이어지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 터입니다.

그러나 아내의 잔소리에 ‘허허’거리며 눙치는데는 내심 ‘내 고질병은 나름 옳은 구석이 있다’는 고집이 꽈리틀고 앉아있거니와  ‘요기서 밀리면 또 그 모임에 이끌려 나갈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상황’을 피해 보자는 꼼수도 곁들여 있는 것이랍니다.

자! 이쯤 제 이야기입니다.

<역사 이래, 살다 죽은 또는 지금 살고 있는,  아니 앞으로 나올 세상 사람 누구나 다 100% ‘하나님의 사람’인 사람은 없고, 100% ‘평범한 사람’도 없다. 신 앞에서는…. 다만 1-99% 사이의 ‘하나님의 사람’, ‘평범한 사람’을 범위를 나누며 상대 우위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람’과 ‘평범한 사람’을 쫙 줄 긋듯 가르는 것은 참 위험하다. (지배의 논리, 죄의 온상이 거기서 싹 트므로…)>

그렇게 운운 했던 것인데….

아무튼 아내의 이야기는  “니가 잘난 척”했다는 것인데 일견 수긍하는 부분도 있고, 그래 허허거리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다 어제 바티칸 뉴스 하나에 오늘 제가 힘을 다시 얻어 “그려, 모임을 피할 까닭은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Francis 교황께서 미사를 통해 하신 말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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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를 제가 읽은 까닭은 <Confession is not like dry cleaners, but is encounter with Jesus (신앙고백 또는 고해란 세탁소에 가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라는 기사 제목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 내용 가운데 하나랍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용기 나아가 기쁨으로 “죄인이라는 우리의 진실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가야한다고, 교황은 말했다.  “우리가 겸손하고 친절하며” 진실된 것을 “요구하시는 신 앞에서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기만해서는 않된다.” (However, people must go before the Lord with courage, even joy, “with our truth of being sinners,” he said. “We must never disguise ourselves before God,” who “asks us to be humble and kind” and truthful.)>

결코 100% ‘하나님의 사람’일 수 없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용기, 그 안에서의 기쁨 – 바로 신앙이요, 믿음이지요.  역사이래 생명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지요. 단 하나 신과 신이였던 사내 빼고 말입니다.

거기 누구라도 사람이 비집고 들어가거나, 그걸 용인하거나 사칭한다면 그게 바로 죄요, 신에 대한 모독인 셈이지요.

그래 발끈했던 것이지만, 암튼 아내의 걱정을 듣는 한 저는 아직 철이 덜 들은 모양입니다.

36계 줄행랑

오늘 온라인 잡지 American Drycleaner에 실린 세탁인들의 말이랍니다. 올 3월과 지난 해 삼월의 매상 비교를 하는 서베이에 커멘트한 말들입니다. 

동네 다섯군데 있던 세탁소 중 나만 살아 남았답니다.([There were] five dry cleaners in town, now I’m the only one.)”

지난 육 주간 조금씩 나아지는 추세랍니다.(It’s [been] getting better for [the] last six weeks)”

동네 시장 환경은 아주 조금씩 꾸준히 나아지고 있는 듯 한데…(market conditions in our area are somewhere between static and slight improvement.)”

해마다 시간이 갈수록 형편이 나빠진다는…(Year over year, the conditions are getting worse)”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대꾸들이랍니다. 좋아진다는 사람도 있고, 갈수록 어렵다는 사람도 있고 말입니다. 

서베이 응답을 보면 서부 지역을 빼 놓고는 미 전역에서 매출이 지난 해보다 못하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아주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세탁인들의 이야기도 있답니다. 

어제 어느 세탁인에게서 받은 전화 내용도 바로 이런 헷갈리는 환경 탓에서 오는 고민이었을 겝니다. 내용인즉은 지난 해 대비 올 1/4분기에 매상이 떨어졌는데 가격을 올릴까 말까하는 물음이었답니다. 

저라고 뭐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뾰족하게 신통방통한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저마다 처한 입장에 따라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일들을 시도하고 되풀이 해 보는 것이지요. 

그 방법들 가운데 한가지랍니다.  얼핏36계 줄행랑과 맞닿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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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불분명 할 때 사람들의 심리도 흥미롭다. 이스라엘 학자 바 엘리는 축구에서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와 골키퍼를 관찰했다. 차는 방향을 보니 왼쪽 1/3, 오른쪽 1/3, 가운데가 각각 1/3이었다. 근데 볼을 막는 골키퍼의 반은 왼쪽으로, 나머지 반은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가만히 있는 골키퍼는 없었다. 볼의 1/3은 가운데로 오는데 왜 가만히 있는 골키퍼는 없을까? 왜 그들은 가만히 있지 못할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동편향이다(action bias).> – Rolf Dobelli의 책 “스마트한 생각들”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일들이지요. 뭔가 불안하고, 앞날이 확실치 않을 때면 무슨 일이던 뭔가 해야만 될 것같은 초조감이 일곤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초조함으로 벌인 일들로 인해 상황은 더 꼬이기도 하곤 하지요. 

하여 때론 조용히 하던 일을 묵묵히 하면서 기본적인 일들에 충실해 보는 것이 최상의 방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무릇 36계 줄행랑이란 도망그 자체에 뜻을 두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밥이 된 사내 이야기 12

다시 성서로 돌아가 보자.

마가복음 4장 30-32에는 이른바 “겨자씨의 비유”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4장 26-29절에는 “자라나는 씨의 비유”가 마태복음 13장 33절에는 “누룩의 비유”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말속에 집어 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올랐다. 하늘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 :33)”는 말을 세상을 확 바뀌는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만 겨자씨의 비유나 자라나는 씨의 비유처럼 나는 서서히 변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 본질 밀가루가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 이야기들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할 일과 하나님의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 하루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 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 나는지 모른다(마가 4: 26-27)” 사람이 할 일은 씨를 뿌리는 일이다. 그것을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가는 과정이란 말이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핵심적 이해는 바로 이것이다. 땅에 씨를 뿌리는 것, 가루에 누룩을 섞는 것, 그것은 사람이 할 일이다. 그리고 씨를 심는 땅, 누룩을 받는 가루는 역사이며 현실이다.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자라고 부풀리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확 바뀌는 어떤 것이 아니라 비록 지금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만질 수는 없어도 역사 안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 나라는 이 천년 전 예수가 서서 말하였던 갈릴리에서부터 오늘 여기까지 지속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곳이며 이 일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초청받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수를 죽음으로 이끌어 간 (아니 어쩌면 그 스스로 이끌려 간) 사람들의 하나님 나라의 이해는 지금 오늘도 곳곳에서 일어 나고 있다. 그를 또 다시 죽음으로 몰고 있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자꾸  뒤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또 어려워졌다. 쉬운 이야기 하나 하자.

 언젠가 “아버지 학교”를 다녀 온 후배가 한 말이다. “제가 확 바뀌었습니다. 기쁘게 살자는 것이죠. 우선 화를 내지 말자. 말의 높이를 낮추자. 성내는 마음을 죽이자. 그렇게 하고 나니 우리 가정이 확실히 바뀌었습니다. 가정이 천국이 되어 갑니다.”

자, 그의 표현대로 그가 확 바뀌었다치자. 그의 가정은 아버지학교를 다녀오기 전이나 다녀 온 후나 구성원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 가정이 천국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먼 곳이 아니다.

기쁨과 나누어 먹는 밥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마침내 말로써가 아니라 그의 온 몸을 던진 증언으로 우리 앞에 다가 온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다가 서는 것이다. 더불어 나누어 먹는 본을 보이며 마침내 그의 몸을 나누는 밥으로 내어 놓은 역사적인 장면 그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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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 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마가 14: 22)” 이 때가 유월절이라고 하였다. 죽기 직전에 마지막 식탁, 그는 나누는 밥상을 온 몸으로 보여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누는 밥상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사족(蛇足)처럼 한 마디 달자. 이즈음 차고 넘치는 교인들의 “나 하나만” 또는 “내 가정만” 아니면 “내 교회만”하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주 다른 곳이다. 물론 나도 그 한 가운데 서 있다.

기쁨에 대한 예수의 실체적인 증언 그것은 바로 부활이다.

“젊은이는 그들에게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사렛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 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전에 말씀 하신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 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하였다.(마가 16: 6-7)”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번역된 ‘에게이로’라는 본래의 말 뜻은 <일어나다> 또는 <궐기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캄캄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일어난, 다시 궐기한 예수는 갈릴리로 그의 삶의 현장이었던 갈릴리로 먼저 향했다. 기쁨은 바로 이것이다. “기쁜 소식” 곧 복음 – 예수가 살아 복음이 되어 오늘 여기 우리들의 갈릴리에서 기쁨으로 일한다는 성서의 증언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를 죽였던 무리들, 그를 따르다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함께 하였던 추종자들은 오늘도 살아 있다. 그들은 어떤 이들 이었을까?

***오늘의 사족

‘아버지 학교’를 통해 확 바뀌었다는 후배는 세월이 흘러 바뀌기 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에게이로’ – 일어나라! 궐기하라! 그게 아직도 누구에게나 유효한 까닭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세태(世態) 이제(二題)

세월이 하수상하니 별별 일을 다 보게 된답니다.

우선 한가지.

어제 커테티컷 Darien에 있는 Sandra’s Cleaners에서 일어난 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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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쯤이었다고 하니 정말 눈 깜작할 사이 코를 베인 형국이랄 수 있겠습니다. 시티 워터 (수도물)을 쓰지 않는다면 세탁소에  필수 장비 가운데 하나인chiller를 뜯어다가 팔아 먹으려던 도둑 두 명이 잡혔다는 뉴스랍니다. 

세탁소에서 일어난 강절도 사건 뉴스는 종종 듣는 것이지만, 세탁소가 한참 일하는 시간에 통상 건물 밖에  놓이게 마련인 장비를 뜯어가는 일은 처음 듣는 일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두 명의 도둑들의 나이에 또 한번 놀랐답니다. 쉰 둘, 쉰 셋이랍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오늘 오후에 뉴저지의 어느 세탁인이 전화를 주셨답니다. 어눌하지만 절실한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만….”으로 시작한 그 이의 문의였답니다.

“오늘, 맡긴 지 오년이 지난 웨딩 가운을 찾으러 온 손님이 있었는데요. 분명 맡긴 영수증을 들고 오긴 했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도 안나고…. 물건도 없고해서…. ‘없다고 했더니…. 화를 내며 돈을 안주면 법정으로 간다며…. 이럴 땐 어떻하면 좋을지요?” 

처음에 제 대답이었답니다.

“뭘 걱정하십니까? 통산 관례법이라는 게 있는데, 5년이면…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는 감사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지만 제가 오히려 찜찜했답니다. 그래 자료를 찾아 보았답니다.

대부분의 주마다 왈 관례에 따라 적용되는 것 같고요. 실제 판례에 나타난 세탁물 보관에 따른 소송 결과들은 이렇답니다. 

Massachusetts Law에 따르면 90일을 보관하도록 되어 있고요. New York Law는 6개월이고요. Ohio Law는 120일로 규정하고 있답니다. 

이런 시비에 말리지 않으려면 넉넉잡고 한 일년 정도는 보관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아무튼 세월이 녹녹치 않아서 일어나는 일인듯 합니다만, 곰곰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은 인류사 수천년 이래 늘 일어났던 일이겠지요. 

무릇 세월이 하수상하다는 말은 느끼기 나름일게고요.

자!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나는 게 사람사는 세상이겠지요.

그렇다하더라도 이즘 세태를 감안하여 chiller도 틈틈이 확인하고, 세탁물과 손님들 확인하며 산다고 손해 볼 일은 아닐 듯하답니다.

 

두려움에

어제  일어난 보스톤 마라톤 대회 현장에서의 참사 보도를 보며 떠오른 것은 9.11 당시의 두려움입니다.

 

당시 실시간 중계되는 TV 모니터를 보면서 웬지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쌓였던 기억이 있답니다.

그날 이후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겪여낸 일들을 돌아보노라면 그 두려움이 까닭없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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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각 현재 아직 사건의 배후나 범죄 소행자들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추정하는 기사들을 보면서 앞으로 이어질 일들에 대해 두려움이 입니다.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한가지.

 

한글로 된 뉴스를 보는 이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인데요.  추측성 기사에 대한 것이랍니다.  이 점 긴 말씀드리고 싶지 않답니다.

 

두려움 곧  fear요 공포입니다. 무릇 대개의 두려움은 알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여기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 “사람”이 “나를 뺀 나머지 사람들”이면 좋겠는데 그게 바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바로 “나에게만 다가온 두려움”이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심각해 지는 것이지요.

 

어쩌면 ‘사람’ 또는 ‘나’와 ‘두려움‘이라는 놈은 아마 뗄레야 뗄 수 없는 끈끈한 관계일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또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하여 딱 지금 “비정상적인 불확실성”앞에 놓인 미국민들만의 것도 아닌 것 같고요.

 

뭐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성서에 수많은 신의 명령들이 나오지요. 일테면 ‘도둑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에서부터 ‘원수를 사랑하라’까지 무수한 신의 명령들이 있다는 말씀인데 그 중에 제일 많이 나오는 신의 명령은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것이랍니다. 뭐 약 360번 정도가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360번 – 바로 일년 365일에 대응하는 숫자랍니다. 사람이란 매일 매일 두려움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고나 할까요.

 

이런 말이 있답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을 꼭 껴안아라.>라는.

 

진정 큰 두려움은 두려움 자체라는 말인데요, 그걸 껴안을 수 있는 이들에게 두려움을 만들 우둔한 사람이나 세력은 없겠지요.

 

내 아이들이 살아갈 땅, 미국을 위해 기도하며….

 

밥이 된 사내 이야기 11

둘째로는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은 “기쁨”이다.

몇 군데 성서를 찾아 읽어 보자.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 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 44, 이하 공동번역 성서)”,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누가 15: 7)”,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누가 15: 9-10)”,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누가 15: 32)” 긴 이야기를 다 인용하지 못하였다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명하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나는기쁨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기쁨이란 것이 죽어 저 세상에 가서 누리는 것이거나 막연하게 생각속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전과 지금의 바뀐 상황에서 누리는 기쁨이라는 말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 잃었던 것을 되찾은 현실, 집 나가갔던 아들의 돌아옴같이 이전과는 다른 어떤 현실 속에서 맛보는 기쁨이다.

예수는 이 천년 전 갈릴리 사람들을 향해 말하였다. 나는 당시의 사람들에게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곳이요라는 설명이 필요 없는 공동의 사전 이해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며 오기를 고대하였던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가 선포한하나님의 나라의 차이 때문에 예수는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고도 하였다. 바로 이 기쁨에 대한 이해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따랐던 추종자들이나 예수와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들에게나 예수의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어찌 보면 좀 황당한 이야기였다.

Point-of-View

먼저 예수를 따랐던 이들의 입장에서 예수를 바라 보자.

“우리를 위하여 태어 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탁월한 경륜가, 용사이신 하나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입니다. 다윗의 왕좌에 앉아 주권을 행사하여 그 국권을 강대하게 하고 끝없는 평화를 이루며 그 나라를 법과 정의 위에 굳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야훼께서 정열을 쏟으시어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루실 일이옵니다(이사야 9: 5-6)”

이 염원은 갈리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유대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표상이다. 그들의 기대는 분명 로마 압제에서의 해방, 로마의 앞잡이 노릇하던 예루살렘 성전체제와 헤롯왕국의 변혁이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다윗 왕권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대신한 구세주가 통치하는 세상을 바랐던 것이다. 그들이 누리는 기쁨이란 바로 그런 나라에서 사는 것이었고 예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따랐다.

예수를 적대시했던 이들의 눈에도 예수는 분명코 무슨 일을 내고야 말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마태 11: 19)” 먹고 마시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가 어울려 다니는 무리들이 문제였다. 먹고 마시되 체제 안에 사람들과 하는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무리와 어울려 먹고 마시고 나누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분명 체제 전복을 노리는 세력 바로 중심이었다.

예수가 말한 상황이 바뀐 곳에서 맛보는 기쁨에 대한 이해는 듣는 이들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섰다. 추종자들에게는 확 바뀐 현실이 곧 다가 올 것이고 그 중심에 예수가 있고 기쁨은 그들의 몫이 된다는 것이었으며, 적대자들에게는 체제 전복의 언어로 다가 선 것이다. 그러다 이들의 이해는 한 곳에서 만난다. 추종자들은 어느새 실망하고 분노한 군중으로 변하고 적대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예수의 죽음이다. 무엇이었을까? “기쁨을 말하였던 예수가 왜기쁨을 고대하였던 당시의 사람들의 함성과 손에 죽게 되었을까?

나는확 바뀌는 세상꾸준히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바뀌는 세상의 차이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의 첫 선포는 매우 다급하고 급박한 표현으로 선언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바로 지금 눈 앞에 다가 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세상은 확 바뀌는 혁명적 세상이 아니다. 바로 이 차이다. 사람들은 당장 맛 보아야할 기쁨, 확 바뀌는 세상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나라를 말하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

필요와 욕망

언젠가 어느 스님의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얻은 한 깨달음입니다. “필요와 욕망을 분별할 수 있는 삶만 살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다”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제 삶에 있어 필요한 것이고, 어디서부터 내 욕망으로 끌고 가는 삶일까? 

불가에서는 “내려 놓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비움”을 말씀합니다. 욕망을 비우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그렇게 비우다 더는 비울 수 없는 것이 “필요”이겠지요. 

나는 어디까지 비울 수 있을까요?

출가(出家)한 사람이 아니니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님들과 또 그렇게 얽힌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우선 확보해 두어야겠지요. 그렇게 우선 확보해둔 기본적인 필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꼽아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필요”부터 따져보니 버려야 할 “욕망”은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지요. 

그래 이번엔 거꾸로 버릴 것을 먼저 버려 보는 것이지요. “욕망”을 벗어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컴퓨터 옆에 있는 종이 한 장 버리는 일에서부터 “망설임”이 먼저 인답니다. 필요를 꼽을 땐 별 시간이 걸리지 않던 것이 욕망을 꼽자니 그 놈의 “집착”이라는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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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버리고, 부모조차 버리고, 지팡이 하나만 달랑 들고 나를 따르라>했던 것은 예수이지요. 

이 쪽으로나 저 쪽으로나 참다운 출가를 하기 전엔  “욕망”의 끈을 놓긴 어려운 일인가봅니다. 

필요와 욕망을 흰 빨래와 검정 빨래 가리듯 가리울 수만 있다면 참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한 수 위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루 온종일 당신을 부르는 소리 가운데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무엇인지요?

 

뭐 일테면, ‘김군아!’라든지 ‘어이’. ‘헤이’ 또는 ‘김사장’, ‘김선생’, 등등 말입니다. 아마 직업과 나이에 따라 저마다 다 제일 많이 듣는 소리들이 다를겝니다.

 

제가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한울아빠”랍니다. 제 아내가 저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세어 보거나 통계를 내보지 않아서 모를 일이지만 그냥 느낌만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루 평균 백번은 족히 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랍니다. 물론  아내가 이 소리를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말입니다.

 

부부가 함께 24시간을 사는 이들은 아마 제 느낌에 동의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글을 쓰기 조금 전의 일입니다. 예의 그 아내의 옥타브 높은 “한울아빠!” 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이게 뭔뜻이야?”하며 책을 내밉니다.  “뭔데?”하며 받아든 책은 혜민 스님이 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담낭암 수술을 받으시고 지난 주에 chemotherapy를 마치신 장모님께 투병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몇 권 드린 적이 있었는데, 장모님께서 일독하신 후 아내에게 건너 온 모양이었습니다.

 

아내가 손가락으로 짚은 혜민스님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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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자의 최고의 표현은 유머입니다. 평화롭고 거룩하고 아주 선해 보이는 상태는 한 수 아래입니다.”

 

아내뿐만 아니라 왈 경건이 최상인 신자들에겐 낯설 법도 한 표현이지만은 “텍스트text”(교과서)와 “컨텍스트context”(현실)의 차이를 잘 표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래 아내에게 한 한마디랍니다. “무릇 깨달음에는 나이가 없나니…”

 

매사 넉넉히 웃으며 살 일입니다.

 

이미 할머니 반열에 오른 아내는 아직도 유치원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유머가 있답니다.

 

하여 말로써는  제가 한 수 위인데, 깨달음은 아내가 한 수 위랍니다.

 

시간에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이민 생활의 자산은 몸뚱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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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노동력이 곧 돈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한인 이민들은 노동집약적인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세탁업에 이르면 그야말로 노동이 곧 돈인 비지네스입니다. 하여 “이민생활의 자산은 몸뚱아리”라는 말은 진실인 동시에 사실입니다.  

돈 곧 자본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나는 것임으로 일괄되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이르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이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용하는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그시간에 대한 생각들을 몇 자 적어 봅니다.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잠들어 있는 시간을 깨워라”라는 책에서는 일곱개의 시간 낭비 요소를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갑자기 불쑥 걸려오는 전화, 예기치 못한 방문객, 회의, 긴급상황, 연기, 사교활동과 잡담, 우유부단함과 미룸’  하지만 필자는 브라이언 트레이시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빼먹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가장 큰 시간 낭비 요소는 위의 낭비 요소를 허락하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누가 전화를 받는가?  누가 방문객을 맞이하는가? 누가 회의에 참석하는가? 누가 긴급 상황을 만들고, 누가 연기를 하는가? 누가 사교 활동에 참가하고 잡담하며 우유부단하게 미루는가?  

바로 자신이다.>  – 양정훈지음 , <9 to6 혁명>에서-

 

시간 씀씀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것이라고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라. 옳은 일에 시간을 쓰고 있는가?” – Randy Paush 라는 교수가 한 이야기입니다.

종교, 골프, 한국비디오(이즈음엔 컴퓨터에 앉아 즐기시는 분들도 제법 많은 듯), 무슨 무슨 각종 회합들… 거기에 얹어 자신의 게으름까지…. 시간에 대해서만은 전적으로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다만 똑 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요. 바로 올바른 정보를 갖고, 바르게 활용한다면 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남보다 좀 더 앞서 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가라(Go)!

참 제 앞가림도 변변히 하지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이 넓어서 이것 저것 생각만 많은 사람입니다만, 이 땅을 이민으로 살면서 고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회”이지요.

참으로 많은 긍정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인 이민들 앞날에 장애물 아니면 애물단지가 바로 이 교회라는 생각에 허풍 조금 보태면 잠 못 이루는 그런 날이 제법 있었다고 말씀 드릴 수도 있겠습니다.

뭐 긴 말씀 드릴 요량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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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자 이야기는 예수의 이런 말씀으로 끝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표준 새번역 개정판)

“Neither do I condemned you; go and sin no more”(New King James Version)

이 구절에 대한 성서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자면 꽤 긴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우선 Go 다음에 나오는 “sin no more”라는 말, 다시는 죄 짓지 말라는  말은 후대 첨가구라는 것이 것이고 예수가 한 원형적 말은 “go” 곧 “가라”라는 말씀으로 끝났다는 것이지요.

근데 어디로 갑니까? 집으로 가는 것이지요. 간음한 여자는 죄인이었습니다. 예수 당시에 병든 사람도 다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는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셨지요. 죄인의 죄를 씻겼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때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가라(go)”입니다.

어디로 가라는 것일까요? 

가족에게로, 일상으로, 평범한 생활 가운데로, 이웃에게로 돌아감입니다. 아니 그 곳으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성서에 다음 구절들이 다 그런 말씀들입니다.(마가복음 1장 44절, 2장 11절, 5장 19절,34절, 8장 26절, 10장 52절 누가복음 7장 15절, 17장 19절 요한복음 5장 9절, 9장 7절, 11장 44절등등)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 당시에 죄인들(병든 자를 비롯한 사회 하부계층 –쯧쯧, 이렇게 표현하면 좌파가 되겠고- 일테면 소외받은 자들 이라고 할까요- 그것도 좌파?)은 일상사에 있어서 “남들처럼 대접받지 못하는”부류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돌아가라”는 이른바 귀환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맹점이랄까 아님 이민교회의 부정적 측면이랄까 그런 것이 드러나는 까닭은 바로 이 “귀환명령”, “돌아가라”, “가라”하는 명령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기 얽매여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이웃으로, 일상으로 돌아가 떳떳하게(신앞에서) 하루하루를 살 수 있도록하는 원천이 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이 얽매는 곳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찰 역시 마찬 가지입니다. 청정도량(淸淨道場)이란 바로 삶, 곧 일상을 위한 곳입니다.

곰곰 생각해 보십시요. 이즈음 교회나 사찰(사찰에 대한 부분은 깊이 천착한 바 없습니다만. 이민의 땅에서 말입니다.) 들이  얼마나 이민들을 얽매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펴낸 조선통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행여 오해가 있을까보아 말씀드립니다만 이건 대한민국 오월출판사에서 펴낸 책으로 뉴욕의 어느 서점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거기 옛날 삼한시대의 “소도(蘇塗)”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쓰고 있더군요.

“<삼국지> 위지 마한전에는 마한 사람들이 ‘도둑질’하고는 도망쳐 ‘소도’라고 부르는 종교행사를 진행하는 곳으로 들어 갔는데 거기에서는 그들을 돌려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중략- 도망쳐 온 인민들에게 종교를 초계급적인 것으로 미화함으로써 그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는 한편 저들의 노예로 부리기 위해 돌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계급의식”이라는 말이 좀 걸리기는 합니다만 어쩌면 예수의 “가라”라는 말은 소도라는 종교적, 사회적 제약을 깨고 어느 곳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는 명령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지요.

오늘날 “이민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명령 ”가라”하는 말씀을 전혀 귀 담아 듣지 않는 까닭에서 오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라는 말씀이지요.

믿음이란 무릇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소도”에 머물 일이 아닙니다. “가야”합니다. 몸만이 나니라 생각과 정신과 맘이 “오늘, 내 삶의 현장에 있어야”겠지요.

아 참! 예수는 “나를 따르라”<follow me>”를 주창하기도 하셨지요. 그건 또 나중에 말씀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