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연가 5

<첫번 땡땡이에 대한 추억>

헐렁한 검정 무명제복 걸친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코 앞에 있는 학교를 걸어 다니다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일은 썩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대앞에서 신문로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광화문 네거리에서 효자동까지 전차를 갈아타야 하는 아침의 새로운 일상은 제겐 고역이었습니다. 특히 버스 타는 일은 전쟁이었습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르르 몰려 드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버스에 올라타는 일이란 작은 체구의 제겐 진짜 진을 빼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막판에 간신히 버스 차문 한 쪽 끝을 잡고 한 다리를 올려 놓으려는 순간 억센 차장 아가씨가 머리에서 빙빙 도는 헐거운 모자를 홱 낚아 채서는 버스 밖으로 날려 버릴 때의 그 참담함은 그냥 슬픔이었습니다.

그래 그 전쟁 피하자고 제가 생각해 낸 꾀가 새벽밥 먹고 일찍 집에서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피해자는 제 어머니와 누나였습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누나와 나는 이른 아침으로 배를 단단히 채우고 집을 나섰지요.

오호!  버스는 텅텅.

앉아 갈 빈 자리도 늘 있게 마련이었답니다.

이게 습관이 되어 결석은 꽤 있어으되 지각이라는 말은 제 사전에 없던 중,고등학교 6년 세월을 보냈답니다.  때론 학교 문이 아직 열려 있지를 않아 담 넘어 학교로 스며든 일도 제법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일찍 새벽에 서두르는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제 첫 번째 땡땡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야하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서의 일이었습니다.

버스에 올라타는 일에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 후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답니다. 전차를 갈아타려 거의 뛰다싶이 했건만 효자동에 내렸을 때는 이미 등교시간을 넘긴 지각이었습니다.

학교에 들어 가기가 그렇게 싫었습니다.

“지각”이라는 게 무슨 붉은 딱지 이마에 붙이는 것 같은 낙인같았습니다.

그래 다시 전차 종점으로 돌아갔지요.

그 날 하루 효자동에서 마포 종점을 몇 번이고 전차를 타고 왔다 갔다 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파할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새로 만드는 전차 승차 패스포드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게 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이었으니까요.

아주 어렸던 시절 제가 새벽형 인간이 된 까닭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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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경험은 제게 일석이조의 득이 되었답니다.

어느 날 전차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광화문에서 효자동까지도 다시 버스를 타야하게 된 것입니다. 전차는 한 달치씩 돈을 내고 패스포드를 끊었지만 버스비는 그날 그날 어머니에게 타서 썼었지요.

하루에 왕복 네 번 타는 버스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신문로에서 내려 청운동까지 걷기 시작했지요. 방과 후에도 똑 같기 걸었지요. 버스비 삥땅을 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제 용돈 만들기였습니다.

    그 때의 전차 풍경

중학교 일학년 때 제2한강교가 개통이 되었지요.

신촌은 그 날 이후 더 이상 촌(村)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신촌연가 4

<할아버지의 추억>

신촌에서 보낸 제 사춘기의 일기에서 할아버지는 빼 놓을 수 없는 분이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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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대노(大怒)하실 일이시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한 할아버지는 머슴의 굴레를 벗어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셨던 평생 머슴이셨습니다.

1901년생이셨던 제 할아버지의 기억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셨습니다.

억세게 힘이 좋은 고주망태 할아버지셨습니다. 그렇게 저희와 며칠 또는 두어 달 함께 계시다가 어디론가 떠나곤 하셨습니다. 그러다 찬바람 일면 다시 한 식구가 되곤 하셨습니다. 들며 나실 때마다 집안에 한바탕 소란이 일곤 했었답니다.

제가 중학교 들어 갈 무렵부터 돌아가시기까지 한 십년 동안 겨울이면 저와 한 방에서 동거하셨던 우리 할아버지는 경기도 평택의 가난한 농가의 세 아드님 중 막내이셨습니다.

“어째 니들은 외탁을 해서… 쯧쯧쯧”

제 아버님과 저를 향해 늘 하시던 말씀이셨습니다. 아버님과 저는 작고 여린 체구인데 비해 할아버지는 이른바 통뼈이셨습니다. 힘이 엄청 좋으셨답니다. 젊어 한 때 평택, 용인 씨름판 황소 차지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나이 스물에 용인 유실마을 문씨 문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셨답니다.

일에는 이골이 나서 누구못지 않은 최고의 머슴이셨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 힘과 술이었답니다. 씨름판 황소끌고 와 그 날로 술판으로 끝내 버리셨던 분이랍니다.

아버님이 채  열살이 되기 전 약수동 고모님 두 살 때, 제 할머님께서 세상을 뜨셨답니다.  할아버지의 본격적인 방랑생활이 시작되었답니다. 아버님과 고모님은 용인 유실마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셨답니다.

훗날 저와 한 방을 쓰면서 할아버지가 제게 들려 주셨던 그 단순, 용감, 무지한 방랑의 한 평생은 어린 제가 듣기에도 측은한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방랑끼는 저와 한 방을 쓰셨던 그 무렵에도 변치 않으셔서  아지랑이 이는 봄날이면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시며 잘 벼린 낫 한자루 춤에 끼시고 “벌초 다녀오마” 그 한 말씀 남기신 후 어디론가 떠나셨습니다. 그리곤 찬 바람 일고 김장철이 될 쯤이면 고주망태의 모습으로 돌아 오시곤 하셨습니다.

어느 해던가 , 아마 제가 대학 1학년이던 해의 겨울이었을 것입니다. 돌아 오셔야 할 할아버지가 소식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답니다. 용인 유실마을, 궤밀마을, 평택, 진천 등지로 아버지의 기억을 쫓아 나선 것이었지요.

“니가 재봉이 손자여”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이지요.

할아버지는 제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어 있었습니다. 끝내 찾지 못하고 신촌집으로 돌아 왔을 때, 할아버지는 만취가 되어 제 방에 누어 계셨답니다.

그 할아버지의 여름, 겨울 한복의 수습은 어머니의 몫이었고, 술 취해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대야 물 받아 닦아주셨던 분은 제 아버님이셨습니다.

1976년 봄.

마지막으로 한 달.

신촌 노고산동 제 방에서 할아버지는 앓아 누우셨습니다. 그렇게 한 달포 동안 오래 누우셨던 일은 당신 평생 처음이었답니다. 할아버지 머리맡에서 우리 아버지 무릎 꿇고 기도하고 찬송을 끊이지 않으셨답니다.

“아부지, 예수 믿고 돌아 가세요. 그래야 천당가세요” 그 말씀 쉬지 않고 하셨지요.

그 때 제 할아버지 하신 말씀.

“이 눔아!  베룩이두 낯짝이 있지…”

제 아버님은 거의 음치에 가까운 분이십니다. 그래도 쉬지 않으시는 아버님의 그 찬송소리가 지겨우셨는지 아님 아버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는지 돌아가시기 사흘 전 “그래 믿자” 그 한마디 할아버지 말씀에 목사님을 부르고 할아버지의 입교식이 이루어졌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묘비에 빨간 십자가 하나 그려 놓으셨지요. 우리 아버님께서.

신촌연가 3

전쟁 후 쏟아져 나온 베이비 붐 첫 세대인 우리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학교는턱없이 비좁았지요. 한 학급에 70명 가량이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였으니까요.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임시막사 건물에는 창천공민학교라는 간판이 따로 있었지요. 입학적령기를 놓친 늦깍이 학생들을위한 교실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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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동 쪽으로는 창천국민학교 분교가 있었지요. 그만큼 교실이 모자랐던탓이었지요.

삼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는 분가를 했답니다. 신촌 노타리에서 연세대로 난 신작로를 경계로 왼편에 있는 동네 곧 서교동, 동교동쪽 아이들은 창서국민학교라는 새로운 학교로 옮기게 된 것이지요. 당시 잘 살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창서, 못살고 뒤쳐지는 아이들은 창천이라는 유언비어도 있었답니다. 그 쪽은 신흥동네이었으니까요.  제 아내가 다니던 학교였지요.

국민학교때 저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아이였답니다. 뭐 특별하게 개구장이라거나, 그렇다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 했다거나 그런 눈에 띄는 것 없는 그저 고만고만한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지요.

학교가 파하면 아버지의 인쇄소가 제 놀이터이었고요.

그즈음 이화여대, 연세대의 사무처에서 쓰는 각종 서식들과 고무직인들은 아버지의 독차지였습니다. 그거 배달하는 일은 제 몫이었지요. 인근의 한국전력도 아버지의 주고객이었고요. 당시 어머니는 밤을 새워 등사판을 밀곤 하셨지요.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었지요.

아버지는 며칠동안 출장길에 나섰답니다. 물론 조수인 저도 따라 나섰지요. 서대문 네거리에 있던 농협중앙회 로비 한쪽 구석에 아버지의 임시도장포가 세워졌답니다. 당시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농협과 거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 꾸며야 하는 서류가 있었고 거기 도장 날인을 하게 되었던가 봅니다. 아버지는 아침 판을 벌리면서부터 농협이 문닫는 시간까지 며칠동안 쉬지않고 막도장을 파 대셨답니다.  저는 그 옆에서 손님들 이름을 받아 적어 아버지에게 건네고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거슬러 주는 일을 했었지요.

그 일이 끝나고나자 우리 가족의 셋방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답니다.

노고산동에 방이 자그마치 네개씩이나 있는 우리 집을 갖게 된 것이지요.  대문가에는 우물도 있고, 앵두나무도 있었지요. 다만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물지게를 지는 일이 제 몫이긴 하였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지요.

무엇보다 저를 설레게 했던 것은 제 방을 갖게 된 일이었지요. 겨울이면 심심초를 즐겨 태우시던 할아버지와 동거를 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이른 봄이면 나가셨다가 늦가을이면 돌아 오시곤 했지요.

개도 키우고 닭도 치고 했었지요.

우리집이었으니까요.

그 시절에도 사교육 바람이 불어, 있는 집 아이들과 없는 집 아이들 편을 가르기 시작했지요. 우주당이니 지구당이니 그런 이름이 붙은 사설학원들이 생겼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앞 둔 아이들을 겨냥한 학원들이었지요.

턱걸이를 단 한 번도 하지 못하는 제게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너는 학원 안 다녀도 턱걸이 여섯 번만 하면 어느 중학교라도 갈 수 있다”

마당에 철봉이 세워지고 턱걸이에 제 중학교 입학 시험에 모든 것을 걸었답니다.

그러나 중학교 일차 시험에서 보기좋게 낙방을 하였답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제가 실력이 안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신 채 “그 놈의 턱걸이 때문에…”라고 굳게 믿고 계시답니다.

약수동 고모님은 재수를 시켜야한다고 강력히 훈수를 두셨지만 “애 버린다”시며 이차 시험을 보게 하셨지요.

저의 새로운 육년 –  청운동 학교생활이 시작된 것이었지요.

신촌연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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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신촌노타리

제 유년과 소년 그리고 청년을 보낸 신촌은 제 부모님들께는 네 남매를 키워 낸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지요.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나선 제 최초의 기억은 네 살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신 상이군인이었지요. 안양유원지였습니다. 그 곳에서 도장포(圖章鋪)를 하시는 친구분을 만나러 나선 길이었습니다. 그 분도 상이군인이었는데 아버지보다 형편이 아주 안 좋으셨답니다. 두 다리를 다 쓰지 못하셨지요. 아버지는 그 친구 분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전수 받았지요.

굴레방다리 경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옆 굴레방 시장 입구에 아버지의 도장포가 들어 선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되서의 일이었지요. 도장포는 이동식 간이 점포였습니다. 나무 상자 안에서 아버지는 도장 파는 도구들과 함께 온 종일을 사셨습니다. 저녁이면 이동점포는 시장안 안면있는 분의 가게에 맡겼지요.

아버지의 도장포는 일취월장이었습니다. 신촌 기차역 시장입구 버스 정류장 앞, 목  좋은 곳에 “신촌 도장포”의 간판이 올라간 것은 제가 국민학교  들어 갈 무렵이었지요.  그리고 간판이 “신촌 인쇄소”로 바뀌는데는 고작 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도장 새기는 일과 프린트라고 부르던 등사인쇄, 그리고 명함과 청첩장등을 찍을 수 있는 작은 활판인쇄기가 있었지요.

아버지는 엄청 부지런 하셨지요. 그리고 틈만 나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답니다. 일제시대 소학교  4학년이  교육의 전부이셨지요. “소야 영문법”이라는 일본인이 쓴 영어책과 한영사전, 영영사전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일을 하셨지요. 당시에는 서예와 한자 공부에 아주 열심이셨습니다.

기억컨대 그런 아버지에겐 친구가 한 분도 안 계셨지요.

훗날  “너희들 키우려고….” 하시며 그까닭을 말씀하셨지요.

그 사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세 차례 하였답니다.

첫 번째 이사는 창천동 면철이네 문간방에서 안방 할머니 문간방으로 옮긴 일이지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십년 전에 한국에 나갔을 때 형제갈비집과 맞은 편에 조선옥이라는 설렁탕집이 있었는데 바로 그 조선옥 뒷 골목에 있던 집들이었지요.

그리고 다음에 옮긴 집이 이대 후문 대신동에 있는 대신동장님 댁이었지요. 이 집에 살 때 그것도 꽤 큰 빽이었답니다. 쌀배급을 동회에서 했었지요. 그 집 셋방 사는 것만으로 순서가 바뀌는 빽이었지요.

다음은 이대 육교 건너 대흥동 태균이네 문간방이었지요. 한 반이었던 태균이보다 제 성적표가 조금 낫다는 이유만으로도 주눅들어 하셨던 어머니의 눈물이 밴 곳이지요.

우리 어머니.

그 때까지 한글을 깨지 못하신 그냥 억척이셨지요. 삼시 세 때 뜨거운 밥과 그날 그날 장을 보아 신선한 반찬, 어머니의 몫이었지요.

아! 프린트. 그 등사판 팔 떨어지게 미는 일도 어머니가 감당하신 일이랍니다.

그렇게 이사를 갈 때마다 식구들이 늘었답니다. 우선 제 아래로 동생 둘이 생겼답니다.  더하여  평생 한량, 노래와 춤을 좋아하시고 거기 마땅히 술이 있어야 좋으신 제 할아버님이 방랑을 멈추고 저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간판이 도장포에서 인쇄소로 바뀐 국민학교 이학년 무렵 문(門)안 출입은 제 차지였지요.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 단성사 뒷골목에 있었던 청조사에 가서 활자 사오는 일과 을지로 지물포에서 종이 전지를 8절, 16절지로 재단해서 들고 오는 일들이었답니다.

꼼꼼하셨던 아버지는 명조체니 고딕체니 귀에 못이 박히게 설명을 하셨고, 한자(漢字)  하나 하나를 그려주시고 “꼭 확인해라”는 말씀을 후렴처럼 붙이셨지요. 제가 한자공부를 하게 된 건 다 아버지 덕이었지요. 그 문안 나들이는 제게 큰 즐거움이었지요. 사춘기로 접어 들기 전까지 말이지요.

그러다  어머니, 아버지의 꿈인 우리집을 갖게 되었지요.

아직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라고 하지만 자꾸 입에 붙어 놓질 못합니다. 이따금 제 아버님께서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는 것처럼) 졸업하기 전 일이었지요.

신촌연가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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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게 문 닫고 돌아 오는 길에 아내와 내기를 하였답니다. 제 세탁소에서 집까지는 평균시속 50마일로 달리면약 17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각자 다니던 초등, 중, 고, 대학교 교가를 얼마나 아는가 하는 시합이었습니다.

이 내기가 시작된 까닭은 제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주신 분이 저희 부부의 고향인 신촌을 강력히 떠오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 옛날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그리 된 것이지요.

처음엔 우리 부부 둘 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였지요. 그러나 아무래도 음악적 소질이나 총기로 봐서 아내가 저보다 백배나 나았습니다. 아내는 그걸 거의 다 기억해 내었습니다만 저는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는 거의 한 소절도 기억해 내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국민학교(우린 그게 더 편하지요) 교가 처음 두 소절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이었습니다.

“노고산 솟은 뫼는 튼튼한 몸을 창천의 맑은 물은 정직한 마음….” 그리곤 영영 감감이지만…

창천국민학교.

당시에 신촌에서는 유일했던 국민학교였지요.

염창동쪽으로 한서국민학교가 있었고, 염리동쪽으로 용강국민학교, 저쪽 수색쪽으로 수색국민학교 아마 그랬을 겁니다. 대현동 위쪽으로 이대부국이 있긴 했지만 그 때 거기 다니던 아이들은 아마 그 시절 특수층(?)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신촌이 버스 종점이었던 시절이지요. 제이한강교가 놓여지고 강 건너와 사통팔방이 된 일이 제가 그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일이니까요.

1953년생들이니까 전쟁후 쏟아진 첫세대였지요.

그 땐 학기가 4월에 시작이 되어서 한 살 어린 저도 그 축에 끼게 되었지요.

당시 아이들 중에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은 거의가 이북 사투리였지요. 충청, 전라, 경상 그 쪽 사투리는 거의 들어 본 기억이 아니 나지요. 그러니까 토박이들과 피난민들이 살던 곳이지요. 고래등 기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루핑집이라거나 하꼬방이라고 부르던 집들이 공존하던 시절이었지요.

“노고산 솟은 뫼는…”하는 창천국민학교 뒷산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았고, 때론 해골바가지들이 튀어나와 제법 용맹을 자랑하던 아이놈들은 그걸로 축구도 하곤 했었지요. 땅굴을 파고 가마니 거적대기를 대문삼아 살던 친구도 있었던 시절이지요. 물론 그 시절에도 이른바 지방토호들이 있었지요. 그 자식들과 땅굴에 살던 아이들과 다들 동무였지요.

“창천의 푸른 물은…” 신촌 창천동에는 창천 – 바로 맑은 물이 흘렀었지요.

아아! 아니에요. 당시만 해도 맑은 물은 아니었어요. 이화여대 쪽으로부터 신촌 기차역 앞을지나 신촌시장 쪽으로 흐르던 창천 위에는 통나무와 짚으로 엮은 다리들이 몇 개 놓여 있었지요. 개천 옆에서 까마중을 입이 까맣토록 따 먹곤 했지만 그 물에선 논 기억이 없으니까요. 당시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빨래를 이고 모래내로 나갔지요.

가마솥에 양잿물 풀어 푹 삶은 옷들.

모래내 맑은 물에 빨아 이고 오시면 하룻길 이었지요.

신촌.

아직 현대판 새마을이 되기 전에 일이지요.

그래봤자 고작 사십 오륙 전의 일이지요.

삶이란?

참! 쩝! 쯥!

개에게 길을 묻다

당(唐)나라 고승(高僧) 조주선사(趙州禪師: AD:778-897)의 일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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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승(學僧) 하나가 선사에게 물었답니다.

“개(犬)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개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지요.

선사 왈.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제자가 와서 똑같이 물었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번엔 선사 왈. “있다”

제자가 다시 물었답니다.

“아니 그럼 부처는 그만 두고 사람이 되지 왜 개로 그냥 있습니까?”

조주선사 호통을 치시며 “얌마! 그건 개한테 가서 물어 봐!”

뭐 당나라 때 뿐이겠습니까?

제 맘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제 안에 있는 부처 하나 느끼지 못하는 처지에 남이 무얼 하건, 개새끼가 무얼하건 그게 도(道)닦는 것과는 뭔 상관이냐는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오늘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이지죠.

순례자든 방랑자든 아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저 같은 사람이든

진리가 뭐 별거 있겠어요.

때론 화살이 되기도 하고 과녁이 되기도 하고

그게 삶이지요.

눈 뜨면 일어나 세탁소로 나가 보일러를 켜고, 일하며 배고프면 먹고,

집에 들어와 아내와 함께 가요무대 보며 세월도 한탄하고 흥얼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자고…

그 일상적인 바로 나의 삶에 도(道)가 있는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심심하면 제가 글질하는 이 짓도 다 저를 위한 것이고요.

그게 때로는 누군가에겐 화살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따듯한 모포 한 장이 될 수도 있고…

과녁이 된 그가 하지 말란다고 아니 할 수도 없고

모포 한 장 더 달란다고 줄 여유도 없고

나도 때론 과녁이 되고

내미는 손도 되고…

그렇지 아니한가요?

무릇 도(道)라는 놈이….

그러다 다투기도 하고 표표히 떠나기도 하는.

다시

화살이 되고

과녁이 되는.

죽 한 그릇

조선조 말기 사람 김병연(金炳淵:1807-1863)은 일명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홍경래가 일으킨 난리가 나자 당시 선천부사로 있던 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은 홍경래에게 항복한다. 이 죄로 김익순은 죽고 그 후손들은 벼슬 길이 막히는 폐족(廢族)을 당한다.

벼슬길도 막히고 심한 차별을 느낀 김병연은 스무 살 무렵부터 큰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전국을 떠돌다가 그가 방랑생활을 하며 읊었던 시(詩)들을 모은 ‘김립시집(金立詩集)’ 한 권을 남긴 채 쉰 여섯 나이에 그답게 객사(客死)하고 만다. 민중들의 애환을 노래하고 권력자들을 풍자하며 조롱하는 그의 시들로 인해 오늘날 그를 조선시대 민중시인이라 부른다.

예의 그 방랑길의 김삿갓,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여러 날 산길을 걸어 기진한 삿갓의 눈에 외딴 오두막집이 들어온다. 지친 걸음을 재촉해 오두막 집에 다다른 김삿갓이 끼니 구걸을 해 보지만 그 집 주인 역시 이 떠돌이 삿갓만큼이나 찢어지게 궁기든 사람인지라 변변히 나그네를 대접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리 뻗을 오두막집이라도 가진 이 집 주인은 나그네를 대접할 요량으로 소반 위에 멀건 죽 그릇을 내밀고는 어쩔 줄을 몰라한다. 말이 죽이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비칠 지경이니 낟알 하나 제대로 찾을 수 없는 맹물같은 죽이었다.

이 맹물죽 한 그릇 대접받은 김삿갓 그냥 있을 수 없어 시 한 수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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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반 위엔 머얼건 죽이 한 그릇/ 뜬구름 그림자가 함께 오가네/ 주인은 미안해서 쩔쩔매나니/ 나야 본시 풍류객 상관이 있오> <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

이름하여 ‘죽 한그릇(粥一器)’이라는 시이다.

이 얼마나 멋들어진 정경인가? 이 얼마나 사는 맛 나는 장면인가? 내 입 풀칠하기도 바쁜 형편에 지친 나그네 그냥 보낼 수 없어 낟알 몇 알 두고 끓인 멀건 죽 한 그릇 내 놓고 미안해 쩔쩔매는 주인의 훈훈한 마음, 그 죽사발을 하늘로 받고 감사하며 또 다시 하늘을 담아 주인에게 바치는 김삿갓의 시 한 수.

풍류하면 제 밥벌이 걱정없이 펑펑 돈 깨나 뿌리며 주지육림에 빠져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것으로나 아는 사람들에겐 이런 풍류의 맛이 시원치 않겠다만 이것이 진짜 세상 살아가는 풍류이다.

주린 배 참다 참다 기진한 채 오두막 등불 하나 만나길 고대하며 발길 옮기는 사람들이 어디 김삿갓 뿐이겠나? 결코 수월치 않은 삶의 길목들, 더하여 때론 산길을 헤매는 듯한 이민(移民)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도 그 지친 삿갓의 모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디 경제의 궁핍뿐이랴! 겨우 몸과 마음의 다리 뻗을 오두막 한 채 가졌으나 여전히 궁기에 빠져 있는 모습 또한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 이런 모습들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주인과 나그네가 멀건 죽 한 그릇 사이에 두고 하늘을 나누어 갖는 정겨운 모습에서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듯 오늘 여기 우리 한인 이민 사회가 서로의 하늘을 나누어 갖는 맛과 멋이 어우러진 사회가 되길 꿈꾸어 본다.

그것이 비록 멀건 ‘죽 한그릇’일지라도…

*** 오늘의 사족

나는 오늘도 죽 한그릇은 나누었다. 좋다.

골프와 장치기(杖球)

지나간 십 수년  동안 이 곳 지방 신문인 The News Journal지에 한국관계 기사나 한국인을 다룬 기사가 1면이나 2면을 장식한 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기억하기로는 전두환, 노태우씨의 구속기사, V자로 꺽였던 성수대교 붕괴사건과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기사,  “정부 수립 후 첫 정권 교체”라는 제목을 단 김대중대통령 당선 기사와 그의 노벨상 소식 그리고 이 곳 DuPont Country Club에서 있은 맥도날드 컵 대회에서 우승한 박세리선수에 대한 기사가 전부이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판 스포츠면에 박세리의 사진과 함께 그녀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골프채를 잡아 보기는 커녕 “골프는 이민(移民)을 망치게 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내가 골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좀 우습기도 하다. 이젠 많이 숙련되어 어떤 모임이건 의례 나오는 골프 화제에 입 꼭 다물고 들을 수 있게까지 되었지만 한 때는 어떤 모임이건 화제가 골프로 옮겨지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곤하였다.  어쨋거나 남한(the South Korean)의 박세리”로 소개 되었지만 그녀로 하여 가게 손님들과의 화제거리가 되니 반가운 일이다.

기록에 의하면 골프는 15세기 무렵에 네델란드에서 시작되어 스코들란드로 전래되어 퍼졌다고 한다. 경기의 규칙이 성문화되기는 1754년의 일이고, 오늘날과 같은 기구와 규칙이 적용되기는 19세기 중엽부터라고 한다.

오늘날의 골프와 아주 흡사한 경기가  한국에 있었다. 조선조(朝鮮朝) 초기 역사기록인 <태종실록: 13년(서기 141년)>, <세종실록 : 3년(서기 1421년)>, 세조실록: 1년(서기 1455년)>등에는 뚜렷한 경기법칙 아래 행해졌던 장구(杖球)경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장구는 몇 사람이 좌우 두 편으로 갈라서서 승부를 겨루게 되는데,  공을 치는 막대기는 숟가락과 같으며, 공을 치는 끝은 손바닥처럼 넓적한데 이것은 물소의 가죽으로 만든다. 가죽이 얇으면 공이 높이 솟아 오르고, 가죽이 두터우면 공은 멀리 가지 않는다. 또한 곤봉(袞俸)도 사용하는데 공같이 둥그런 것이 달려있는 이 곤봉으로 공을 치면 공이 뱅글뱅글 돌면서 뛰어 오르지 않고 자리만 이동한다. 이 모두 두텁고 얇은 정도와 크고 작은 모양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한다.

공은 나무로 만들거나 차돌을 사용했고 그 크기는 계란만 했다 한다. 땅을 파서 주발 모양같은 구멍을 만드는데 이것을 와아(窩兒)라 불렀다. 이 와아는 전각(殿閣)을 사이에 두고 파 놓기도 하고, 층층대 위에 파 놓기도 하며 또는 평평한 땅에 얼마만큼 동떨어지게 파 놓아 공이 들어 갈 자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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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쳐서 구멍에 들어 가면 2점을 얻는다. 한 번 쳐서 들어가지 못했으면 공이 멈춘 곳에서 다시 쳐 들어가면 1점을 얻는 방법으로 경기가 진행된다. 세종 때와 세조 때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엇비슷한 방법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는데 주로 궁궐 안에서 임금과 종친들이 즐기던 것이었다. 일반 서민층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기가 유행하였는데 이를 얼레공치기라 하였다.

이 얼레공치기는 최근세까지 전래되어 지난 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그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1931년 2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 “장구 얼레공 대회 개최”라는 제하의 기사를 사진과 함께 보도하고 있다. 그 장구경기, 얼레공치기의 기술이 살아나 박세리, 김미현등의 별들이 한국의 이름을 빛내는 것은 아닐런지.

***오늘의 사족

당시의 박세리는 오늘날 김연아였다.

아니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오늘의 김연아 이상이었다.

한반도나 한인들의 긍정적 뉴스를 듣거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날은 참 기분 좋다. 이민 이후 줄곧….

 

 

(2001. 4. 26)

부자 대물림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몰락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죽음으로 숨가쁘게 한국의 개발경제시대를 이끌어 온 한 세대가 끝났다. 정주영 –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그는 일세를 풍미한 입지전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늙으막 소떼와 막걸리통을 싣고 북행하였던 그의 모습에서 고향에 대한 강한 귀소본능을 엿보았듯, 수 많은 조문객들과 검소를 강조한  그의 마지막 길 떠난 모습에서 현대차가 이 땅 미국에 이리도 많이 굴러다니는 까닭을 알 수 있을 듯하다.

“부자 삼대 없다”는 속담은 대물려 부를 유지하기가 썩 수월치 않음을 말한다. 정주영회장이 이룩한 현대왕국도 오늘날 한국경제가 짊어진  짐들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보아 그 앞날이 썩 순탄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화신백화점을 비롯한 해방 이후 부자 첫세대들은 당대에 깃발을 내렸고 박정희 개발독재시대에 부를 이루었던 부자들도 대부분은 당대에, 더러는 다음대에 부의 명성을 잃었으며 어쩌다 삼대 째 내리 그 부를 누리는 집안도 있지만 선대에 비하면 초라한 듯하다. 왜 부자 삼대가 그리 힘들까?

“어기여라 톱질이야, 당겨주소 톱질이야” 흥부와 그의 아내가 신나게 톱질을 한다.

첫째 박을 타서 나온 쌀로 밥을 지어 남산만큼 쌓아 놓고 아들 스물 다섯을 불러낸다.(째지게 가난했어도 엄청나게 새끼 욕심은 많았나보다) 궁기에 찌들었던 놈들은 총알처럼 밥더미를 파고들어 아그적 아그적 그 많은 밥을 먹어 치운다.

여기까지는 좋다. 착한 성정의 흥부 일가네가 일차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큰 축복은 그 착함에 따른 당연한 응보일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 박을 타면서 시작된다. 없는 것이 없게 다 나오는 둘째 박에 이어 셋째 박을 타면서 흥부는 졸부가 된다. 치부(致富)한 흥부는 넓고 큰 누각과 창문만도 천 개가 되는 거대한 호화 주택을 짓고 별당엔 천하절색 양귀비를 첩으로 들여 앉힌다. 겉치장으로 부를 한껏 과시한 흥부는 일자무식인 자신과는 격에 맞지않게 큰 책방을 짓고 시경, 서경, 사서삼경에 고문진보등 책으로 그 방을 꽉 채운다. 무식을 감추려는 허세를 부려 본 것이다.

졸부가 된 이후의 흥부의 놀아나는 꼴로 보아 스물 다섯이나 되는 아들들에게  부를 물리기는커녕 당대에 거덜이 났을 듯 싶다.

겉으로 부를 과시하고 치장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질이 한국에 대물린 부자가 드문 현상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십년이 넘도록 도처에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시절, 보릿고개가 해 마다 찾아 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세월,  인천항에 구호미가 산더미처럼 입항했다는 기사가 신문의 머릿기사이던 그 60년대를 지나 “잘 살아 보자”는 깃발 아래 모여 허리띠 조이고 땀 흘린 댓가로 70년대을 넘어서며 절대 빈곤이라는 일차적 가난을 이겨 내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 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집을 갖고 마침내 더 좋은 외제 차를 타야 직성이 풀리는, 겉보기에 높아지려는 사회적 분위기는 마침내 파국을 맞았다.  그 뿐인가? 바탕이나 기초도 없이 인격적인 치장을 하자니 온통 허세 뿐이지 않았나? 이 다리 허전하게 바탕없는 외형 치장 성향이 부가 붕괴되는 사회현상, 부자가 삼대 못가는 현상이 생기도록 한 것은 아닐런지.

잘 사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분수에 맞게 살고 그 남은 부나 재물을 사회에 되돌리는 풍토가 정착된 사회에선 부의 대물림이 몇 대인들 내려 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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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길게 부를 대물림 했던 가문은 경주 최진사댁이라고 한다. 최진사댁은 해마다 1만 석 이상의 남는 재물을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가통(가통)이 있었다.  그 가통 때문에 십대 만석꾼, 십대 진사의 유례없는 부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고 정주영회장의 남은 후대들 뿐만 아니라 오늘 부를 누리고 사는 모든 집안들이 그 부를 대물림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면 한국의 미래는 진정 밝을 것이다.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29일의 일기였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오늘.

최진사댁이 세운 대학을 가로챘다는 의심을 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따님께서 권력을 대물림하였다.

딱하다.

부끄러움을 넘어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파동으로 시끄럽다.

일본 문제가 불거질 때면 등장하는 반일 구호와 현수막, 탑골공원의 궐기대회 사진과 함께 온통 반일 민족주의자들 뿐이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나 싶게 모두가 잠잠하다. 그러고 또 다시 애국적 저널리즘과 프랭카드, 반 세기 동안의 반복다.

이 점 일본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눈치보며 과거를 정당화하다가 세 불리하면 슬그머니 꼬리를 뺀다. 그러다 가시 보수 우익을 앞세워 과거 찬양의 목청을 높인다. 때린 자의 부끄러움과 맞은 자의 부끄러움을 진정 헤아리지 못한 탓이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먼저 그 부끄러움을 청산하고 이겨내는 민족이 앞설 것이다.  가해의 역사를 기록한 민족이 그 부끄러움을 청산하지 못하면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피해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 그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면 그 또한 맥이 끊긴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요, 종교적 역사관이다.

한민족의 역사를 훑다보면 일본 식민지 35년(일제 36년 – 이것 부터 고쳐야 한다. 만 35년에서 열 나흘이 빠지는 기간이다)보다 더 험난했던 세월이 있었다.

남도석성

고려 후기 13세기에 있었던 몽고족의 침략기간이 바로 그 때였다.

1206년 징키스칸이 몽골국가를 일으킨 후 그와 그의 군대가 지난 가는 곳마다 피바다를 이루었다. 징키스칸의 아들이 전장에서 죽자 그 지역 주민을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였다는 기록이 있고보면 그 잔인함이 오죽했으랴!

징키스칸의 아들 오코타이가 태종왕이 된 직후인 1231년, 장수 살레타이를 앞세워 한반도를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273년 4월 김통정 이하 70여명의 삼별초군이 제주도에서 최후의 항쟁으로 전멸하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은 한반도 전체를 유린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고 14세기 초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가 망하기까지 100여년 간 한반도는 처참하였다.

(한반도의 역사보다 이스라엘 역사에 박식한 기독교인들은 바벨론 시대의 유대를 상상하면 될 것이다.) 고려인들 특히 가진 것 없었던 백성들과 천민들은 목숨이 다하도록 몽골족과 맞서 싸웠다. 당시 무신정권의 권력층들이 강화도로 피신하여 제 뱃속 차리기에 여념이 없어 그 곳에서도 권력다툼으로 나날을 보냈 때 그 정권 아래서 핍박받던 백성들은 목숨을 마다치않고  침략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삼별초 – 권력의 호위병들이었던 그들이 민족의 초병이 되어 마지막 한사람까지 침략자에게 대항하다가 죽은 역사는 세계사에 보기 드문 기록이다.

그 시절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들이었다. 잔인한 적들과의 긴 싸움으로 많은 반도의 고려 여인들이 몽골인들에게 성을 유린 당하였다. 이것은 전쟁의 아픔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가정마다 파괴될 상처였다.

도대체 제 몫을 못했던 당시 임금들 가운데 그나마 원종(元宗)임금이 왕 노릇 한 번 하였다.

“호수만복(湖水滿服) – 커다란 연못을 파고 “이 물에 몸을 씻으면 모든 더러움이 깨끗해 진다.”라고 선언한 임금의 명령으로 많은 여성들과 가정이 살아 남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얼마나 거룩하기까지 한가?

그것은 종교다. 그것은 역사다.

요단강 강물에 흠뻑 담갔다 나온 몸이 깨끗해졌다는 믿음, 세례수 한 방울 머리에 떨어짐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믿음이 종교이듯, 더러워진 몸 연못에 들어갔다 나옴으로 깨끗해졌다는 사회적 약속, 또는 믿음 그것이 새 힘을 낳는다. 그것이 부끄러움을 털어 버리는 일이다. 제 부끄러움을 알고 털어버리는 의식,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일이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먼저 하는 자가 이긴다. 민족뿐 아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 평범하게 이 땅을 살아 갈 우리도 마찬가지다.

***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22일의 글이다.

얼핏 세상은 완전히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다. 2013년 이즈음엔. 숨기고 감추고 뻔뻔하게 덧칠하는 세력들이 더욱 판치는 세상인 듯 하다. 모든 세(勢)들이 그리로 모이는 듯 하다.

그러나 아니다!

무릇 역사는 긴 호흡으로 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