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으로…

벌써 사년 전 일입니다만 당시 USA TODAY는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이 날로 힘들어 지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For immigrants, living the dream is getting tougher)

많은 이민자들이 스물비지네스를 통해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최근 불어닥친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하며, 이들의 삶이 이민초기의 무일푼의 상태로 되돌아 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스몰비지네스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내 약 150만명의 이민자들이 스몰비지네스를 소유하고 있으며 비이민자에 비해 이민자들의 스몰비지네스 창업율이30%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About 1.5 million immigrants own U.S. businesses, according to a study for the Small Business Administration by Rob Fairlie, an economics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Santa Cruz. He found that immigrants are 30% more likely to start a business than non-immigrants.).

미국내 스몰비지네스의 12.5%가 이민자들 소유이며 멕시칸 이민자의 스몰비지네스 소유가 2.22%로 가장 많고 다음이 한인으로 전체의 0.78%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도표 참조)

immigrant_VA

신문은 남미,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이민을 와서 옷가게, 식당, 세탁소, 그로서리등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사는 이렇게 끝납니다.

“내 피와 땀과 눈물을 이 땅에 쏟았습니다. (오늘의 고통은) 실로 슬픔입니다.” (I put my blood, sweat and tears in this place. It’s a sad story.)

한인 이민자들인 우리들의 삶은 어떨까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은 우리 한인 이민자들이 스몰비지네스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도 신문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우리들의 착각과 편견을 벗어 내 버리면 말입니다.

다른 통계를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안계 대다수가 평균적인 중산층 수입 이하의 소득수준을 보이고, 1가구당 수입이 다른 인종(백인, 흑인, 히스패닉)에 비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5가구중 1가구가 빈곤선 이하) 게다가 아시안계 가정의 54%가 영어 미숙자로 언어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80-20 initiative)

저는 착각과 편견을 이야기했습니다. 많은 한국 이민자들은 아시안계에 속하기를 거부합니다. 특히나 남미나 흑인계 이민들과 비교되는 것들도 꺼립니다. “한국인”을 이야기 하고 높은 학력과 아시아의 유태인으로 견주기를 즐겨합니다. 이 땅의 타 민족 이민자들 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는 자부가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이젠 솔직해 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위에 통계나 USA TODAY의 기사와 우리 한인 이민자들의 실상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자부”는 지녀야 할 덕목이지만 그 보다 먼저 “솔직”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위의 USA TODAY 기사는 1970년대 중반에 그리스에서 이민을 와서 세탁소(Four Seasons Cleaners)를 경영하고 있는Panayiota Koskiniotis 씨의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이다.”라고.

저 역시 그의 말에 동의를 합니다.

비록 경기침체의 끝은 보이지 않고, 갈수록 스몰 비지네스로 생계를 꾸려가지 힘들만큼 현실의 여건은 어렵더라도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입니다.”

언어의 장벽, 문화의 이질감, 터무니 없이 적은 자본능력 등등 현실을 헤쳐 나갈 도구들도 충분치 않지만 여전히 “길게 보면 이 땅은 살 만한 곳입니다.”

“솔직”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아 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이 “이 땅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비록 어려운 경제환경과 우리들이 지닌 핸디캡들(언어의 장벽, 문화의 이질감, 터무니 없이 적은 자본능력)에도 불구하고 세탁소를 비롯한 스몰 비지네스로 성공 이민의 꿈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함(frankness)”과 “진정성(authenticity)”으로 내 비지네스를 키우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삶의 정치 – 그리고 인생 여정

00_x9788946038738

<우파와 좌파의 논쟁이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없는 까닭은 그들이 삷의 정치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Anthony Giddens이 그의 저서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Beyond left and right)>에서 갈파한 말이다.

그는 급진과 보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정치모델이 필요하고 이는 이미 이행되어 가고 있다고 주창한다.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모든 부문에 걸쳐 세계 도처에서 좌파와 우파는 대립과 투쟁과 갈등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솔직히 좌로 조금 기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적인 틀(일테면 미국과 세계, 한반도의 남북 또는 남쪽의 상황)을 이해하는 방법이 그렇다는 말이다. 특히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좌로 좀 더 기울 것이다. 수년동안 내가 고뇌하고 있는 이민신학(移民神學)은 기실 정치, 해방, 민중신학과 십 수년래 미국에서 풍미한 예수세미나 회원들의 고뇌의 성과물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이른바 거룩한 보수정통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이해란 예수쟁이와는 거리가 꽤 먼 것으로 비췰 수 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는 케리그마, 말씀의 선포 곧 설교자들의 설교도 토론이 병행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는 바 이런 생각들은 좌의 끝자리쯤일 것이다. 

이런 내가 아주 꼴통보수우익으로 수성(守城)코자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찬송가 부르기다. 내 주는 방패되시니’, ‘죄짐맡은 우리구주’, ‘뜻없이 무릎꿇는’같은 고전적인 찬송에는 함께 하다가도 이즈음 유행하는 복음성가에는 도대체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일이다. 특히 이즈음엔 생업(生業)으로 하는 복음성가 가수들도 있어서 어쩌다 그 이들의 노래를 들을라 치면 왠지 노래하는 기교와 가락이 배어 있는 듯하여 내가 좋아하는 노래꾼 김민기보다도 덜 종교적이란 생각이 들곤하는 것이다. 

거의 드문 일이지만 어쩌다 참석한 집회에 찬양과 경배 그런 순서가 있어서 박수치고 율동하고 그러면 참으로 나는 좌불안석이 되곤 한다. 게다가 찬양 인도자가 ‘박수치세요’, ‘율동하세요’, ‘!자 함께 은혜 받아요’ 하기라도 하면 왜 집을 떠났던고, 성경 한 줄 읽고 고민할 걸 가히 후회막급이라! 이 아니 꼴통보수 아니랴! 그러나 교회사에는 피아노도 경망스럽다하여 금기했던 세월도 있었으니 원조보수는 아닌 셈이다. 

그런 나도 이따금 흥얼거리는 복음성가가 하나 있다. 이것 역시 고전이다만,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열고 말하리 예수 인도 하셨네…”하는 노래이다. 산다는 것이 다 그렇지 좌편 끝 길을 걸을 때도 있고 우편 끝 모서리에서 뒤뚱거릴 때도 있으며 높은 언덕 꼭대기에 서서 시원한 바람 맞으며 세상 내 손 안에 쥘 때도 있고 시궁창에 빠져 숨조차 내쉬기 힘든 때도 있기 마련이지 어찌 바른 길로만 올곧게 걸을 수 있겠는가? 돌아볼수록 부끄러운 걸음이지, 오직 떳떳함 뿐이로다할 사람 몇이나 있겠는가? 그런데 하늘문 열고 말한다지 않는가? 예수가 여기 인도했노라고 그게 믿음이지, 당당한 믿음이지. 

여기까지 온 것도 예수 인도하신 까닭이요, 피안(彼岸) 저 편에 다달아 예수가 인도하였다는 고백을 하려면 지금 오늘을 예수 안에서 살아야 되는데 거기 무슨 우파와 좌파가 있으랴! 뛰어 넘어야지. 어찌 삶의 정치뿐이겠나? 하여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내 인생 여정 끝내어를 노래하는 한 진정 좌파와 우파의 자리는 없다. 

그래, 봄으로 찾아오는 이 사순절 그렇게 살자. 내 인생 여정 끝내어…

밥과 기쁨 -2

바로 지금 오늘 여기에.

첫 생각을 잃어 버리게 된 것이다. 예수는 분명하나님의 나라를 첫 설교에서 선포하였고 그의 생애를 통해 즐겨 이야기하였는데 그 나라가 어떤 곳이냐하는 물음이 없어진다면 이건 좀 우스운 이야기 아닌가 말이다. 나는 아무래도 그 나라가 어떤 곳이냐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겠다.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체의 설명없이 예수는 막바로 그 나라가 다가왔다라고 선포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천년 전 유대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자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보자. 

IMG_4137

1980대 중반의 서울, 사람들이 연일 모여 데모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마이크를 붙들고 “여러분, 마침내 이 땅에 민주화가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외쳤다. 사람들이 “민주화가 무엇이오?”하고 묻겠는가 아니면 “와”하고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겠는가? 

또 다른 이야기 하나. 2015년 어느 날, 남북 문제가 아주 잘 풀려서 남북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치자. “칠 천만 한민족 동포 여러분! 마침내 통일이 다가왔습니다” 그랬다고 상상이나 한 번 해 보자는 말이다. 그 때 “통일이 무엇이오?”라고 묻겠는가 아니면 “어, 어”하며 설레임과 말 못할 두려움 그런 것들에 휘감기겠는가? 설명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우리네 역사 경험에서 갖게 된 통일과 민주화에 대한 어떤 표상이나 현실에 대해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솔직이 내가 이 글편들을 쓴 것은 몇 년 전 일이다. 한국은 민주화된 나라라는 것이 이 글을 쓸 당시 나의 인식이었다. 헌데 2013년 현재의 한국은 “민주화가 가까이 왔습니다”라는 선포가 여전히 유효한 땅이다. 어쩜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똑 같은 거 아닐까?)  

나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이해가 이와 거의 엇비슷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나라에 대한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당시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함께 느끼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염원과 그 나라가 온다는 믿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에워싸기 시작했고 예수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들과 자신의 생각이 다른 부분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게 바로 하나님나라 비유 이야기들이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자. 예수는 기도의 원형을 가르쳐 주었다. 

모이면 외우는 주기도문이 그것이다.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나라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그리고 그 나라는 “임하는” 것이다. “임하다” 곧 “come”이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만 하겠다.

하나님 나라는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포나 나라가 임하소서 하는 기도에서 하나님 나라는 역사 한복판 곧 우리들의 삶의 현장 바로 오늘 여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 어디를 훑어 보아도 한국적 생각과 관습에 젖어 쓰는 “천당”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표현은 없다. 더더군다나 “천당에 간다”는 표현도 없다. 다만 주로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들이 있지만 이 말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천당에 간다”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마태의 유대교적 전통과 그들의 역사적 관습에 따른 표현 “성전에 들어간다”고 하는 매우 현실적 상황을 나타내는 어법이라는 말인데(이 부분은 슈바이쳐의 해석이다) 또 조금 어렵게 나갔다만 성서의 본뜻은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것이지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적어도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뜻의 그런 나라는 아니다. 그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한 복판 바로 여기 지금 오늘 가까이 왔다. 그렇게 온다. 그게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오늘의 사족> : 천국, 가까이 온 하늘나라는  바로 우리들의 구멍가게 바로 그 곳으로 온다. 코너 스토아, 네일가게, 가발 가게, 잡화, 세탁소, 야채가게 등등 바로 오늘 하루를 지지고 볶는 그 곳에…

바로 지금 오늘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