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연가 6

<말표 운동화>

신작로(新作路), 문(門)안.

신촌 우리 또래들이 쓰던 말 가운데 제2한강교가 들어선 후 빠르게 사라진 말들입니다. 사방으로 새로운 길들이 열리거나 넓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대문(四大門)안이라고 해서 “문안에 들어간다”던 말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젠 시내(市內)라는 말을 쓰게 되었고 신촌은 이미 시내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딱지치기, 구술치기(다마치기라고했지요), 다방구,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비석치기등 동네 놀이에서도 졸업을 하게되었습니다.

중학교시절엔 이렇다 할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중학교 정문 앞에서 일어난 1.21사태라는 무장공비 사건이 있었군요. 자하문 앞이지요. 저희 학교 학생 하나가 목숨을 잃었지요. 지금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해 여름에 그 친구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반공영화를 학교에서 찍은 기억이 납니다. 땡볕에서 몇 시간이나 전교생들이 서 있었지요. 몇몇 아이들은 더위에 지쳐 쓰러지기도 하고…

그즈음에 제 즐거움은 서대문에 있는 4.19도서관에 가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쇄소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습니다.

옵셋 인쇄기가 들어오고 부터는 총천연색 인쇄물을 찍는 진짜 인쇄소가 되었답니다. 그즈음부터 아버지의 인쇄소는 제게서 멀어졌습니다. 제 또래의 사환 아이도 들어오고 인쇄기술자와 도장을 파는 견습생까지 달린 아버지의 가게에서 마땅히 제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상태라는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의 집은 독립문 부근이었지이요. 아직 사직터널이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상태와 저는 방과후 신문로까지 꼭 함께 걸었답니다. 그리고 거기서 각자 신촌과 독립문으로 가는 버스를 탓었지요.

어느 날인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대문까지 걸어가자는데 뜻이 통해 좀 더 걷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4.19 도서관이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소설책들입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그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 상태와도 멀어졌지요. 춘원 이광수에서 시작하여 정비석, 장용학에 이르기까지 학교 수업시간에도 어제 읽었던 그 소설에 빠져 있곤하였답니다. 뭔 소리인지도 모르고 읽은 헷세의 데미안에서부터 카네기 인생론, 간디… 제 즐거움이었지요.

신촌 동네친구들은 주로 교회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친구들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민학교 때까지는 몰랐는데 일류학교, 이류학교, 삼류학교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 더하여 잘 사는 아이들, 못 사는 아이들이라는 계층 형성이 시작된 것입니다.

운동화.

그즈음 제 신발은 줄기차게 까만 말표운동화였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도 단화라고 부르던 학생구두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저처럼 까만 말표운동화였답니다.

그런데 주일 날 교회에 가면 이야기가 달라졌지요.

단화에서부터 그 무렵 쏟아지기 시작한 각종 무늬의 이른바 이즈음의 스포츠 운동화들을 아이들이 신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교회 모임이 끝나면 아이들은 새로 생긴 분식집으로 몰려가곤 했지요.

저는 꾸준히 말표운동화이었고, 삼시 세 때 어머니가 해 주신 밥만 먹고 살아야 정석인 줄 알았지요.

어느 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데 얼굴 하얀 계집아이가 저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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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촌스럽게 맨날 말표운동화야!”

아이들은 그 말 한마디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요.

그래 어쨋냐구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말표운동화로 그냥 쭉 나갔답니다.

대학교 때는 말표 하얀 고무신 신고 학교를 갔고요.

 

신촌연가 5

<첫번 땡땡이에 대한 추억>

헐렁한 검정 무명제복 걸친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코 앞에 있는 학교를 걸어 다니다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일은 썩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대앞에서 신문로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광화문 네거리에서 효자동까지 전차를 갈아타야 하는 아침의 새로운 일상은 제겐 고역이었습니다. 특히 버스 타는 일은 전쟁이었습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르르 몰려 드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버스에 올라타는 일이란 작은 체구의 제겐 진짜 진을 빼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막판에 간신히 버스 차문 한 쪽 끝을 잡고 한 다리를 올려 놓으려는 순간 억센 차장 아가씨가 머리에서 빙빙 도는 헐거운 모자를 홱 낚아 채서는 버스 밖으로 날려 버릴 때의 그 참담함은 그냥 슬픔이었습니다.

그래 그 전쟁 피하자고 제가 생각해 낸 꾀가 새벽밥 먹고 일찍 집에서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피해자는 제 어머니와 누나였습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누나와 나는 이른 아침으로 배를 단단히 채우고 집을 나섰지요.

오호!  버스는 텅텅.

앉아 갈 빈 자리도 늘 있게 마련이었답니다.

이게 습관이 되어 결석은 꽤 있어으되 지각이라는 말은 제 사전에 없던 중,고등학교 6년 세월을 보냈답니다.  때론 학교 문이 아직 열려 있지를 않아 담 넘어 학교로 스며든 일도 제법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일찍 새벽에 서두르는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제 첫 번째 땡땡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야하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서의 일이었습니다.

버스에 올라타는 일에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 후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답니다. 전차를 갈아타려 거의 뛰다싶이 했건만 효자동에 내렸을 때는 이미 등교시간을 넘긴 지각이었습니다.

학교에 들어 가기가 그렇게 싫었습니다.

“지각”이라는 게 무슨 붉은 딱지 이마에 붙이는 것 같은 낙인같았습니다.

그래 다시 전차 종점으로 돌아갔지요.

그 날 하루 효자동에서 마포 종점을 몇 번이고 전차를 타고 왔다 갔다 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파할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새로 만드는 전차 승차 패스포드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게 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이었으니까요.

아주 어렸던 시절 제가 새벽형 인간이 된 까닭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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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경험은 제게 일석이조의 득이 되었답니다.

어느 날 전차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광화문에서 효자동까지도 다시 버스를 타야하게 된 것입니다. 전차는 한 달치씩 돈을 내고 패스포드를 끊었지만 버스비는 그날 그날 어머니에게 타서 썼었지요.

하루에 왕복 네 번 타는 버스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신문로에서 내려 청운동까지 걷기 시작했지요. 방과 후에도 똑 같기 걸었지요. 버스비 삥땅을 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제 용돈 만들기였습니다.

    그 때의 전차 풍경

중학교 일학년 때 제2한강교가 개통이 되었지요.

신촌은 그 날 이후 더 이상 촌(村)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신촌연가 4

<할아버지의 추억>

신촌에서 보낸 제 사춘기의 일기에서 할아버지는 빼 놓을 수 없는 분이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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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대노(大怒)하실 일이시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한 할아버지는 머슴의 굴레를 벗어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셨던 평생 머슴이셨습니다.

1901년생이셨던 제 할아버지의 기억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셨습니다.

억세게 힘이 좋은 고주망태 할아버지셨습니다. 그렇게 저희와 며칠 또는 두어 달 함께 계시다가 어디론가 떠나곤 하셨습니다. 그러다 찬바람 일면 다시 한 식구가 되곤 하셨습니다. 들며 나실 때마다 집안에 한바탕 소란이 일곤 했었답니다.

제가 중학교 들어 갈 무렵부터 돌아가시기까지 한 십년 동안 겨울이면 저와 한 방에서 동거하셨던 우리 할아버지는 경기도 평택의 가난한 농가의 세 아드님 중 막내이셨습니다.

“어째 니들은 외탁을 해서… 쯧쯧쯧”

제 아버님과 저를 향해 늘 하시던 말씀이셨습니다. 아버님과 저는 작고 여린 체구인데 비해 할아버지는 이른바 통뼈이셨습니다. 힘이 엄청 좋으셨답니다. 젊어 한 때 평택, 용인 씨름판 황소 차지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나이 스물에 용인 유실마을 문씨 문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셨답니다.

일에는 이골이 나서 누구못지 않은 최고의 머슴이셨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 힘과 술이었답니다. 씨름판 황소끌고 와 그 날로 술판으로 끝내 버리셨던 분이랍니다.

아버님이 채  열살이 되기 전 약수동 고모님 두 살 때, 제 할머님께서 세상을 뜨셨답니다.  할아버지의 본격적인 방랑생활이 시작되었답니다. 아버님과 고모님은 용인 유실마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셨답니다.

훗날 저와 한 방을 쓰면서 할아버지가 제게 들려 주셨던 그 단순, 용감, 무지한 방랑의 한 평생은 어린 제가 듣기에도 측은한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방랑끼는 저와 한 방을 쓰셨던 그 무렵에도 변치 않으셔서  아지랑이 이는 봄날이면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시며 잘 벼린 낫 한자루 춤에 끼시고 “벌초 다녀오마” 그 한 말씀 남기신 후 어디론가 떠나셨습니다. 그리곤 찬 바람 일고 김장철이 될 쯤이면 고주망태의 모습으로 돌아 오시곤 하셨습니다.

어느 해던가 , 아마 제가 대학 1학년이던 해의 겨울이었을 것입니다. 돌아 오셔야 할 할아버지가 소식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답니다. 용인 유실마을, 궤밀마을, 평택, 진천 등지로 아버지의 기억을 쫓아 나선 것이었지요.

“니가 재봉이 손자여”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이지요.

할아버지는 제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어 있었습니다. 끝내 찾지 못하고 신촌집으로 돌아 왔을 때, 할아버지는 만취가 되어 제 방에 누어 계셨답니다.

그 할아버지의 여름, 겨울 한복의 수습은 어머니의 몫이었고, 술 취해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대야 물 받아 닦아주셨던 분은 제 아버님이셨습니다.

1976년 봄.

마지막으로 한 달.

신촌 노고산동 제 방에서 할아버지는 앓아 누우셨습니다. 그렇게 한 달포 동안 오래 누우셨던 일은 당신 평생 처음이었답니다. 할아버지 머리맡에서 우리 아버지 무릎 꿇고 기도하고 찬송을 끊이지 않으셨답니다.

“아부지, 예수 믿고 돌아 가세요. 그래야 천당가세요” 그 말씀 쉬지 않고 하셨지요.

그 때 제 할아버지 하신 말씀.

“이 눔아!  베룩이두 낯짝이 있지…”

제 아버님은 거의 음치에 가까운 분이십니다. 그래도 쉬지 않으시는 아버님의 그 찬송소리가 지겨우셨는지 아님 아버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는지 돌아가시기 사흘 전 “그래 믿자” 그 한마디 할아버지 말씀에 목사님을 부르고 할아버지의 입교식이 이루어졌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묘비에 빨간 십자가 하나 그려 놓으셨지요. 우리 아버님께서.

신촌연가 3

전쟁 후 쏟아져 나온 베이비 붐 첫 세대인 우리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학교는턱없이 비좁았지요. 한 학급에 70명 가량이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였으니까요.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임시막사 건물에는 창천공민학교라는 간판이 따로 있었지요. 입학적령기를 놓친 늦깍이 학생들을위한 교실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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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동 쪽으로는 창천국민학교 분교가 있었지요. 그만큼 교실이 모자랐던탓이었지요.

삼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는 분가를 했답니다. 신촌 노타리에서 연세대로 난 신작로를 경계로 왼편에 있는 동네 곧 서교동, 동교동쪽 아이들은 창서국민학교라는 새로운 학교로 옮기게 된 것이지요. 당시 잘 살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창서, 못살고 뒤쳐지는 아이들은 창천이라는 유언비어도 있었답니다. 그 쪽은 신흥동네이었으니까요.  제 아내가 다니던 학교였지요.

국민학교때 저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아이였답니다. 뭐 특별하게 개구장이라거나, 그렇다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 했다거나 그런 눈에 띄는 것 없는 그저 고만고만한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지요.

학교가 파하면 아버지의 인쇄소가 제 놀이터이었고요.

그즈음 이화여대, 연세대의 사무처에서 쓰는 각종 서식들과 고무직인들은 아버지의 독차지였습니다. 그거 배달하는 일은 제 몫이었지요. 인근의 한국전력도 아버지의 주고객이었고요. 당시 어머니는 밤을 새워 등사판을 밀곤 하셨지요.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었지요.

아버지는 며칠동안 출장길에 나섰답니다. 물론 조수인 저도 따라 나섰지요. 서대문 네거리에 있던 농협중앙회 로비 한쪽 구석에 아버지의 임시도장포가 세워졌답니다. 당시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농협과 거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 꾸며야 하는 서류가 있었고 거기 도장 날인을 하게 되었던가 봅니다. 아버지는 아침 판을 벌리면서부터 농협이 문닫는 시간까지 며칠동안 쉬지않고 막도장을 파 대셨답니다.  저는 그 옆에서 손님들 이름을 받아 적어 아버지에게 건네고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거슬러 주는 일을 했었지요.

그 일이 끝나고나자 우리 가족의 셋방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답니다.

노고산동에 방이 자그마치 네개씩이나 있는 우리 집을 갖게 된 것이지요.  대문가에는 우물도 있고, 앵두나무도 있었지요. 다만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물지게를 지는 일이 제 몫이긴 하였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지요.

무엇보다 저를 설레게 했던 것은 제 방을 갖게 된 일이었지요. 겨울이면 심심초를 즐겨 태우시던 할아버지와 동거를 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이른 봄이면 나가셨다가 늦가을이면 돌아 오시곤 했지요.

개도 키우고 닭도 치고 했었지요.

우리집이었으니까요.

그 시절에도 사교육 바람이 불어, 있는 집 아이들과 없는 집 아이들 편을 가르기 시작했지요. 우주당이니 지구당이니 그런 이름이 붙은 사설학원들이 생겼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앞 둔 아이들을 겨냥한 학원들이었지요.

턱걸이를 단 한 번도 하지 못하는 제게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너는 학원 안 다녀도 턱걸이 여섯 번만 하면 어느 중학교라도 갈 수 있다”

마당에 철봉이 세워지고 턱걸이에 제 중학교 입학 시험에 모든 것을 걸었답니다.

그러나 중학교 일차 시험에서 보기좋게 낙방을 하였답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제가 실력이 안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신 채 “그 놈의 턱걸이 때문에…”라고 굳게 믿고 계시답니다.

약수동 고모님은 재수를 시켜야한다고 강력히 훈수를 두셨지만 “애 버린다”시며 이차 시험을 보게 하셨지요.

저의 새로운 육년 –  청운동 학교생활이 시작된 것이었지요.

신촌연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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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신촌노타리

제 유년과 소년 그리고 청년을 보낸 신촌은 제 부모님들께는 네 남매를 키워 낸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지요.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나선 제 최초의 기억은 네 살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신 상이군인이었지요. 안양유원지였습니다. 그 곳에서 도장포(圖章鋪)를 하시는 친구분을 만나러 나선 길이었습니다. 그 분도 상이군인이었는데 아버지보다 형편이 아주 안 좋으셨답니다. 두 다리를 다 쓰지 못하셨지요. 아버지는 그 친구 분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전수 받았지요.

굴레방다리 경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옆 굴레방 시장 입구에 아버지의 도장포가 들어 선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되서의 일이었지요. 도장포는 이동식 간이 점포였습니다. 나무 상자 안에서 아버지는 도장 파는 도구들과 함께 온 종일을 사셨습니다. 저녁이면 이동점포는 시장안 안면있는 분의 가게에 맡겼지요.

아버지의 도장포는 일취월장이었습니다. 신촌 기차역 시장입구 버스 정류장 앞, 목  좋은 곳에 “신촌 도장포”의 간판이 올라간 것은 제가 국민학교  들어 갈 무렵이었지요.  그리고 간판이 “신촌 인쇄소”로 바뀌는데는 고작 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도장 새기는 일과 프린트라고 부르던 등사인쇄, 그리고 명함과 청첩장등을 찍을 수 있는 작은 활판인쇄기가 있었지요.

아버지는 엄청 부지런 하셨지요. 그리고 틈만 나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답니다. 일제시대 소학교  4학년이  교육의 전부이셨지요. “소야 영문법”이라는 일본인이 쓴 영어책과 한영사전, 영영사전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일을 하셨지요. 당시에는 서예와 한자 공부에 아주 열심이셨습니다.

기억컨대 그런 아버지에겐 친구가 한 분도 안 계셨지요.

훗날  “너희들 키우려고….” 하시며 그까닭을 말씀하셨지요.

그 사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세 차례 하였답니다.

첫 번째 이사는 창천동 면철이네 문간방에서 안방 할머니 문간방으로 옮긴 일이지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십년 전에 한국에 나갔을 때 형제갈비집과 맞은 편에 조선옥이라는 설렁탕집이 있었는데 바로 그 조선옥 뒷 골목에 있던 집들이었지요.

그리고 다음에 옮긴 집이 이대 후문 대신동에 있는 대신동장님 댁이었지요. 이 집에 살 때 그것도 꽤 큰 빽이었답니다. 쌀배급을 동회에서 했었지요. 그 집 셋방 사는 것만으로 순서가 바뀌는 빽이었지요.

다음은 이대 육교 건너 대흥동 태균이네 문간방이었지요. 한 반이었던 태균이보다 제 성적표가 조금 낫다는 이유만으로도 주눅들어 하셨던 어머니의 눈물이 밴 곳이지요.

우리 어머니.

그 때까지 한글을 깨지 못하신 그냥 억척이셨지요. 삼시 세 때 뜨거운 밥과 그날 그날 장을 보아 신선한 반찬, 어머니의 몫이었지요.

아! 프린트. 그 등사판 팔 떨어지게 미는 일도 어머니가 감당하신 일이랍니다.

그렇게 이사를 갈 때마다 식구들이 늘었답니다. 우선 제 아래로 동생 둘이 생겼답니다.  더하여  평생 한량, 노래와 춤을 좋아하시고 거기 마땅히 술이 있어야 좋으신 제 할아버님이 방랑을 멈추고 저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간판이 도장포에서 인쇄소로 바뀐 국민학교 이학년 무렵 문(門)안 출입은 제 차지였지요.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 단성사 뒷골목에 있었던 청조사에 가서 활자 사오는 일과 을지로 지물포에서 종이 전지를 8절, 16절지로 재단해서 들고 오는 일들이었답니다.

꼼꼼하셨던 아버지는 명조체니 고딕체니 귀에 못이 박히게 설명을 하셨고, 한자(漢字)  하나 하나를 그려주시고 “꼭 확인해라”는 말씀을 후렴처럼 붙이셨지요. 제가 한자공부를 하게 된 건 다 아버지 덕이었지요. 그 문안 나들이는 제게 큰 즐거움이었지요. 사춘기로 접어 들기 전까지 말이지요.

그러다  어머니, 아버지의 꿈인 우리집을 갖게 되었지요.

아직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라고 하지만 자꾸 입에 붙어 놓질 못합니다. 이따금 제 아버님께서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는 것처럼) 졸업하기 전 일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