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4

<떠남, 버림 그리고 만남>

호주에서 33년간 이민목회를 정리하시고 은퇴하신 홍길복목사의 글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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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토리들이 주는 의미

 

이제는 위에서 나누어 본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이들 이민 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의 경험담이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신학적 반성(Theological Reflection)을 해야 할 차례다. 두가지 교훈이 있다고 보는데 이는 모두 다 기독론과 관계된다. 기독교란 결국 예수에 대한 이해와 해석과 고백이요, 그렇게 깨닫게 된 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따라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는 그리스도의 화육사건(The Incarnation )의 연속적 재현이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도성인신 사건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따라, 그와 더불어,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기독론을 끊임 없이 연습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생각 하셨던 방식으로 여러분도 자기 자신을 생각 하십시오.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계셨으나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셨고, 그 지위의 이익을 고집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조금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자,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지위를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낮추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분은 특권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심 없이 순종하며 사셨고, 사심없이 순종하며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참혹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 5-8, 유진 피터슨의 신약 번역 “메시지”)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행위의 변형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이는 겸손하게 행동 하신것이 아니라 겸손한 인간이 되신 본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야말로 두잉(doing)이 아니라 비잉(being)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진짜로 사람이 되셨지, 사람이 되신 것처럼 가면을 쓰고 찿아 오신 분이 아니다. 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고 참 사람이 되신 사건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본질이고 핵심이다. 

 

그런 각도에서 이민자들과 이민교회는 예수를 다시 설명하고 기독론을 재해석한다.

 

이민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는 이민자다.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이민을 왔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베들레헴을 떠나 에굽에 가서 피난 살이를 했다. 그는 여권도 비자도 없이 불법체류자로 살았다. 그는 이천 년전에 이미 보트 피플(boat people)로 국경을 넘어간 불법 입국자였다. 그의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온 후 그는 나사렛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태어난 출생지와는 전혀 상관 없는 땅에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주변인간, 변두리 사람으로 사셨다. 그는 한번도 의사 결정의 중심부에 들어가지 못했다. 버려진 땅에서 잊혀진 사람과 함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 가운데서 고난의 시대를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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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민사건은 하나님의 <떠남>과 <버림>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버리고> 사람이 되셨다. 그리하여 <떠남>과 <버림>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기독교 선교의 본질이 되었다.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은 교회는 아직 교회가 아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기 땅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성서는 모두 것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에덴을 떠나고 시날 평지를 떠나고 갈데아 우르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이 되어 그랄과 불레셋을 떠나고 다시 하란과 가나안을 떠나고 마침내는 애굽을 떠난 사람들의 떠나고, 버리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라 잃은 유대인들은 조국을 떠나 이역에서 포로의 삶을 살았으며 나그네와 행인이 되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유대인의 정체성이며 심볼이다. 신약시대의 제자들은 부모와 이웃, 형제와 친구들을 떠나면서 배와 그물, 전통과 관습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일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죽음의 행진을 계속했다.  그들의 흩어짐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넓히는 촉매와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아직 떠날 준비 조차도 되어 있질 않다. 그러니 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경험도 없이 하늘로 올라 갈 생각을 하고 있다. 죽지도 않고 부활을 노래하는 것은 헛되고 우스운 일이며, 버리지도 않고 얻겠다고 하는 발상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행히도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코리안들은 일단 지리적으로나마 떠난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에게 숙제로 주어진 요구 사항은 이 지리적 떠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신적 이별과 함께 영적인 순례의 길을 걷는 일이다.

 

하늘을 떠나 땅으로 오신 하나님은 이제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다. <떠남>과 <버림> 다음에는 새로운 <만남>이 있어야 한다.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은 흙과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들을 만나 주셨고 그 인간들과 하나가 되었다. 더 이상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사는 곳으로 오셨다” (요한복음서 1:14절, 개역 개정판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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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목회는 조국과 함께 그 땅에서 맺어졌던 모든 과거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체의 전통과 습관, 문화와 역사를<떠남> <버림>으로 시작되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음으로 꽃피어 진다. 하지만 몸은 떠났지만 생각과 마음은 여전히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 어느 곳에 붙박이처럼 박혀 꿈적도 하지 않는 이민자들과 이민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아직도 나를 이 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고 혹시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나를 불러주지나 않을까 하면서 기웃거리는 사람은 아직 떠나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오늘날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선교행위는 아직도 1세기의 가현설(Docetism)을 넘어서지 못한채 표류하고 있다. 세상은 교회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수룩하지 않다. 우리가 정말로 가난한지, 아니면 그냥 가난한 척 하고 있는지, 교회가 진짜로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냥 겉으로만 섬기고 사랑하는 척 하는지, 목사들이 참으로 겸손한지, 아니면 그냥 내숭을 떠는지, 훤히 우리들의 속을 다 들여다 보고 있다.

 

몸에 밴 권위주의적 생각과 습관에 매여 목사랍시고 손가락으로 지시만하고, 물질에 눈이 어두워 높은 연봉과 좋은 사택, 좋은 자동차에만 관심을 갖고, 삼박자 축복을 포함한 기복주의 신앙에 젖에 아무나 보고 축복한다며 자신을 무슨 축복의 통로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새로운 선교의 현장에 적합한 사람이 못된다. 이민목회는 나라 떠나 찢기고 상처 투성이인 이민자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생각과 삶을 같이 하고 동고동락하는 동화작업이다. 목사나 선교사는 목자이고 신도나 교민들은 양 이라고 생각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는 개혁 신학이 아니라 카톨릭적 발상이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아니라 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양이다. 인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양이고 오직 예수만이 목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