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기쁨 -2

바로 지금 오늘 여기에.

첫 생각을 잃어 버리게 된 것이다. 예수는 분명하나님의 나라를 첫 설교에서 선포하였고 그의 생애를 통해 즐겨 이야기하였는데 그 나라가 어떤 곳이냐하는 물음이 없어진다면 이건 좀 우스운 이야기 아닌가 말이다. 나는 아무래도 그 나라가 어떤 곳이냐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겠다.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체의 설명없이 예수는 막바로 그 나라가 다가왔다라고 선포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천년 전 유대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자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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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대 중반의 서울, 사람들이 연일 모여 데모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마이크를 붙들고 “여러분, 마침내 이 땅에 민주화가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외쳤다. 사람들이 “민주화가 무엇이오?”하고 묻겠는가 아니면 “와”하고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겠는가? 

또 다른 이야기 하나. 2015년 어느 날, 남북 문제가 아주 잘 풀려서 남북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치자. “칠 천만 한민족 동포 여러분! 마침내 통일이 다가왔습니다” 그랬다고 상상이나 한 번 해 보자는 말이다. 그 때 “통일이 무엇이오?”라고 묻겠는가 아니면 “어, 어”하며 설레임과 말 못할 두려움 그런 것들에 휘감기겠는가? 설명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우리네 역사 경험에서 갖게 된 통일과 민주화에 대한 어떤 표상이나 현실에 대해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솔직이 내가 이 글편들을 쓴 것은 몇 년 전 일이다. 한국은 민주화된 나라라는 것이 이 글을 쓸 당시 나의 인식이었다. 헌데 2013년 현재의 한국은 “민주화가 가까이 왔습니다”라는 선포가 여전히 유효한 땅이다. 어쩜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똑 같은 거 아닐까?)  

나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이해가 이와 거의 엇비슷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나라에 대한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당시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함께 느끼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염원과 그 나라가 온다는 믿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에워싸기 시작했고 예수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들과 자신의 생각이 다른 부분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게 바로 하나님나라 비유 이야기들이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자. 예수는 기도의 원형을 가르쳐 주었다. 

모이면 외우는 주기도문이 그것이다.

이렇게 시작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나라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그리고 그 나라는 “임하는” 것이다. “임하다” 곧 “come”이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이 이야기를 먼저 해야만 하겠다.

하나님 나라는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선포나 나라가 임하소서 하는 기도에서 하나님 나라는 역사 한복판 곧 우리들의 삶의 현장 바로 오늘 여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 어디를 훑어 보아도 한국적 생각과 관습에 젖어 쓰는 “천당”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표현은 없다. 더더군다나 “천당에 간다”는 표현도 없다. 다만 주로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에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들이 있지만 이 말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천당에 간다”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마태의 유대교적 전통과 그들의 역사적 관습에 따른 표현 “성전에 들어간다”고 하는 매우 현실적 상황을 나타내는 어법이라는 말인데(이 부분은 슈바이쳐의 해석이다) 또 조금 어렵게 나갔다만 성서의 본뜻은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것이지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적어도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뜻의 그런 나라는 아니다. 그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한 복판 바로 여기 지금 오늘 가까이 왔다. 그렇게 온다. 그게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오늘의 사족> : 천국, 가까이 온 하늘나라는  바로 우리들의 구멍가게 바로 그 곳으로 온다. 코너 스토아, 네일가게, 가발 가게, 잡화, 세탁소, 야채가게 등등 바로 오늘 하루를 지지고 볶는 그 곳에…

바로 지금 오늘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