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가게 뒤편 주차장은 언제나 텅 비워져 있습니다. 이따금 건물 입주자들이나 배달 또는 수리 차량들이 이용하기는 하지만 대개는 늘 빈 공간입니다.
헌데 지난 주는 예외였습니다. 아침 안개가 멀리 사라지기 전인 이른 시간부터 주차장은 꽉 메워져 있었습니다. 가게 건물 뒤편에 있는 시 보건시설 건물에 사전투표소가 설치되었기 때문입니다. 보건시설 주차장이 이미 꽉 찬 탓에 차들이 이웃 주차공간들까지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었답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가 사는 주의 투표결과는 너무나 뻔하거니와 당락에 끼치는 영향도 아주 미미하답니다. 선거인단 수가 고작 3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랍니다. 아무튼 이번 선거열기는 제법 뜨거운 듯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살 때 대통령 선거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았던 때엔 유신헌법과 이어진 전두환 시절이라 그랬답니다.
이민 이후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시민권을 얻어 제 생에 첫 대통령 선거를 한 것이 2000년 공화당 아버지 부시와 민주당 엘 고어가 붙었던 때였답니다. 세어보니 올해 선거가 벌써 일곱 번 째입니다.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를 해 본다는 들뜸과 그 때만 하여도 나름 젊었던 탓에 정치참여 단체에 이름을 올리고 제법 열렬히 선거운동도 했답니다. 아시안계 이민자들을 위한 정책과 한반도 통일 까지는 아니어도 평화에 대한 정책, 그리고 정부 지원을 받는 영세민 상태를 겨우 벗어나 의무는 다하되 아둥바둥 살아가는 중산의 최하층인 제가 속한 계급을 위한 정책 등에 가장 적합한 인물들을 위한 운동이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물론 대통령선거 뿐이 아니었지요. 다 지나간 이야기입죠.
이젠 그저 혼자 중얼거리며 비나리만 한답니다.
‘더는 갈라치기 말고…. 더는 싸우지 말고…. 있는 편들은 조금 덜며 살고…. 없는 쪽은 조금 더 치열하게… 피선거권자들이 아닌 선거권자들이 조금만 더 현명해지기를…’
어제 아침 일입니다. 빨갛게 떠오르는 해도 서늘한 날씨에 놀랐는지 구름 속에 숨어 빛을 발하고 있었답니다. 늘 그렇듯 토요일 아침은 저도 좀 게으르답니다. 가게 문을 열려고 하는데 바로 문 앞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누워 파르르 떨며 곧 넘어가려는 듯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깃털도 몇 개 빠져 있었답니다.
‘도대체 왜 여기서…’하는 생각은 이내 숨은 답에 이르렀습니다. 여린 아침 햇살이 드리운 하늘을 담은 가게 유리창을 창공으로 착각한 녀석이 들이받아 일어난 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녀석은 게으른 아침을 떨치고 일에 빠져야 할 나를 조금 허둥거리게 하였습니다. 우선 녀석을 햇살이 들지 않는 기둥 그늘로 옮겨 놓고는 가게 문 열 준비를 하였답니다. 신경이 온통 녀석에게 꽂혀 급히 가게 문을 열고는 작은 종지에 물을 담아 녀석 부리 앞에 놓아 두었습니다. 녀석은 곧 스러질 듯 여린 숨을 할딱일 뿐 내 부산한 몸짓엔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한 시간이 가까이 지날 무렵까지 녀석은 그렇게 맥을 못 추고 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고 손님들은 들락거리기 시작하여 녀석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바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반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녀석이 물을 쪼는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녀석은 깡총걸음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해가 구름을 벗어날 즈음 녀석은 휑하니 날아갔답니다.
일도 잠시 잊고 녀석을 쳐다보던 제게 일기 시작한 것은 작은 희열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깊어 가는 가을의 나른한 아름다움이 그 희열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떨어져 구르는 마른 나뭇잎들 마저 바람에 살아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마다 이 맘 때면 나도 모르게 절로 흥얼거리곤 하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정태준이 시를 짓고 곡을 얹은 ‘가을이 오는 소리’ 또는 ‘추심(秋心’입니다.
<가을이 오는 소리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귀 기울여 들어보니 내 맘에서 오는 소리/ 아, 아 잎은 떨어 지는데 / 귀뚜라미 우는 밤을 어이 새워 보낼까.
가을이 오는 소리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귀 기울여 들어보니 내 맘에서 오는 소리/ 아 아 잎은 떨어 지는데 / 귀뚜라미 우는 밤을 어이 새워 보낼까.
지는 잎에 사연 적어 시냇물에 띄어볼까/ 행여나 내 님이 받아 보실까/ 아 아 기러기는 나는데 / 깊어가는 가을 밤을 어이 새워 보낼까>
족히 한 스무 해가 지나간 것 같습니다. 안산 시립 합창단이 필라델피아에 와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 날 밤, 모처럼 짧게 누렸던 내 문화생활의 여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답니다. ‘내 맘의 강물’, ‘내 마음 그 깊은 곳에’ 등과 함께 ‘가을이 오는 소리’를 흥얼거리며 살고 있는 연유랍니다.
올해도 어느덧 깊어져 가는 가을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갑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이 가는 소리는 낙엽 떨어지는 소리, 귀뚜라미 우는 소리, 기러기 날개 짓 소리 보다 먼저 내 맘에서 들리는지도 모릅니다.
그게 어디 계절이 오고 가는 소리 뿐이겠습니까? 세월이 흐르는 소리, 시대가 바뀌는 소리, 내 삶의 여정 그 마디 마디 이어가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게 바로 제 맘일 터이지요.
이웃 도시 필라델피아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던 엊저녁이었다. 내가 사는 델라웨어 주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운동팀으로 꼽는 첫 번 째가 미식축구로는 Philadelphia Eagles요, 야구로는 Philadelphia Phillies 농구로는 Philadelphia 76ers이니 여기도 어찌 보면 범 필라델피아 상권에 속한다 할 게다.
필라델피아는 내겐 여전히 낯선 이웃 대도시이다. 이젠 그 이름이 많이 쇠락했다만 한 때 필라델피아의 한인거리로 알려졌던 5가 거리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1970년대 동두천이나 의정부로 데려가곤 한다.
개인적인 일로 필라를 찾는 일은 이젠 거의 없다. 좋은 벗들과의 만남이 있는 날들이면 어쩌다 올라가곤 하는데 일년이면 손에 꼽을 정도이다.
엊저녁엔 정말 오랜만에 필라 시내 한 복판 건물 숲속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 참 좋은 벗의 아들이 장가가는 날이었다. 필라 시청에서 가까운 빌딩 숲 속, 분수대 앞에 펼쳐진 예식장은 초가을 맑은 하늘이 그대로 내려 앉아 아늑했다.
필리핀계 카톨릭 의식에 따라 진행된 예식은 부부의 연(緣)에 대한 뜻을 아주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예식에 이어 건물 50층에 있는 연회장에서 바라본 필라시 전경은 이제껏 내가 그리고 있는 필라시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필라시는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저녁은 함께 식탁에 둘러 앉은 벗들로 하여 풍성하기까지 하였다. 티 없이 맑고 밝은 신부의 쾌활함이 그 아름다운 저녁을 빛냈다.
꼭 있어야 할 몇 몇 벗들이 함께 하지 못했는데, 그들은 엊저녁 비슷한 시간에 펼쳐진 중국인촌 행사에 우리 풍물놀이패로 참석한 탓이었다. 어제 아들 장가를 들인 벗도 아들 결혼식이 아니었다면 그 풍물패와 함께 였을 것이다.
그렇게 멋진 저녁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 입는데 주머니 속 지갑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주차장에서 나올 때 지갑을 꺼내 카드로 결제를 하고 나온 기억이 선 하건만 양복 주머니 속에도 차 안에서도 찾을 수 가 없었다. 순간 나는 허둥거렸다. ‘하이고~ 이를 어찌지….’ 하며 쯔쯔 거리고 있는 사이, 아내가 ‘쯔쯔쯔…’ 더 크게 혀를 차며 지르는 소리였다. “여깄고만… 왜 그리 덤벙거리시나!” 지갑은 차 시트 사이에 떨어져 있었단다.
하여 떠올린 지난 주에 읽었던 책 캐스린 슐츠의 <상실과 발견>속 한 대목이다.
<조사기관과 보험사 데이터에 따르면 우리는 저마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대략 아홉 번 물건을 찾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우리가 60세가 되면 거의 20만개의 물건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물론 잃어버린 물건들을 전부 다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되찾을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물건을 찾느라 허비한 시간이다. 평생 동안 우리는 사라진 물건을 찾느라고 대략 6개월의 시간을 꼬박 소모한다. 이는 미국에서 집단적으로 하루에 5400만 시간을 소모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돈도 지출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한 해 약 300억 달러가 오로지 잃어버린 휴대폰 때문에 사용된다.>
그녀가 이 책을 쓴 게 2022년도이니, 지금은 그녀가 말한 수치들은 더욱 늘어나지 않았을까.
잃어버려 아쉬운 물건들과 결코 되찾을 수 없는 시간에 더해 정말 아쉬워야 하는 것 바로 잃어버린 기억들이 아닐런지.
어제 식장에서 함께했던 벗들과 풍물패로 거리에 나선 벗들과 종종 함께하며 같을 뜻을 찾고자 같은 몸짓을 하는 친구들을 이어 준 끈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일이었다. 나이 차이로 보자면 거의 한 세대 간격이 벌어지는 모임이다. 더러는 민주, 통일, 평화, 이민 등등 저마다 주관심사들에 있어 작은 차이들은 있다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며 서로가 존중되어지는 안전한 사회를 꿈꾸는 일에는 같은 생각을 지닌 벗들이다.
나는 비록 늦은 나이지만 벗들을 통해 많이 깨우치며 산다. 이젠 돌아서면 쉽게 잃어버리는 기억들로 홀로 혀 차는 시간들이 늘어간다.
허나 참 좋은 벗들과의 연대는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아름다운 필라의 저녁을 만끽하게 해준 이종국선생 내외에게 감사를. 이종국선생을 축으로 같은 뜻으로 이어진 참 좋은 벗들에게 고마움을.
<추가 글 – 어제 중국인촌에 풍물패를 앞세워 함께 참가한 필라 우리센터의 호소문 하나>
지난 2년간 우리는 차이나타운이 있는 필라시 중심부에 경기장을 건설하려는 76플레이스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이어왔습니다. 많은 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지금까지 공사 진행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필라 주민 모두의 목소리를 모아 시의회에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경기장이 아닌 지역 주민 생활에 도움이 될 정책에 집중하라 요구해야 합니다.
필라델피아 차이나타운은 센터시티에 마지막으로 남은 노동계층 유색인종 커뮤니티입니다. 또한, 경기장 건설을 저지하기 위한 이 싸움은 단순히 특정 커뮤니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힘을 합쳐 우리 삶의 터전인 이 도시가 부자들의 탐욕에 짓밟히는 걸 막아야 합니다.
미국에서 스포츠 경기장 건설은 주로 유색인종 커뮤니티의 주거지를 허물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많은 유색인종 주거지가 스포츠 경기장 건설 과정에서 사라졌습니다.
스포츠 경기장 건설은 저임금, 비정규직, 계절노동자들에 의존하며, 그 과정에서 노동계층 유색인종 커뮤니티를 빈곤의 수렁에 가둡니다.
76플레이스 경기장 건설계획 주도자들은 재산세를 면제받을 예정입니다. 이러한 결정은 저소득층 커뮤니티 복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경기장 건설은 필라시를 비롯한 펜주 재정에 10억 달러의 세수 손실을 초래합니다. 이는 주변 지역 소상공인, 노동자 및 그 가족들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어집니다.
한 동네를 파괴하는 결정이 이렇게 쉽게 이루어진다는 건, 어떤 동네든 쉽게 파괴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필라시민은 우리 자신과 이웃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결정에 대해 반대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개발사업자의 이익이 아닌, 시민들의 도시임을 기억합시다.
도심 경기장 건설로 도시가 더 좋아진 적은 없습니다. 반면 경기장 건설이 도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확실합니다. 개발사업자들은 유색인종 커뮤니티를 착취했고, 시민들의 요구는 묵살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는 반복된 역사에서 얻은 이 교훈을 통해
이런 날은 참 행복하다. 더할 나위 없이 맑은 초가을 마음이 마냥 여유로운 하루, 손에 든 책에 완전히 빠져 든 날에 누린 행복이다.
나이 쉰이고 제법 이름 꽤나 알려진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라는데 나는 그녀의 책이 처음이다. 케스린 슐츠(Kathryn Schulz)가 쓴 <상실과 발견, Lost & Found>이다. 책에 쉽게 빠져 들게 한 요인 중 하나일게다. 바로 번역자 한유주 덕이다.
300여쪽 제법 긴 자전적 에세이에 엉덩이 몇 번 들썩이지 않고 반나절 빠져 지냈다. 몸에 받으면 좋은 영양제가 될 듯한 가을 햇빛과 그 볕으로 나는 열을 식혀주곤 하는 마른 바람은 오늘 내가 누린 복을 더했다.
내 초기 이민 생활에 큰 힘이 되었던 월트 휘트만(Walt Whitman)의 시들을 다시 곱씹을 수 있게 한 것은 이 책이 덤으로 내게 준 행복이다.
에세이를 읽으며 post-it flag들을 이리 많이 붙여 보긴 처음인 듯하다. 그만큼 내가 빠져 시간을 보냈다는 징표일게다.
책 마무리 부분에 나오는 몇 문장이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드는구나.” C의 아버지, 빌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딜 보나 평범한 사람치고 나는 경이로운 삶을 살아온 것 같아” C의 아버지는 실내 배관이 없는 집에서 자랐고…그는 평생을 농부로, 식료품점 점원으로, 관리인으로, 경비원으로 일했고….>
내 또래일 작가의 배우자 아버지에 대한 묘사인데 세탁업이 평생 직업인 내가 종종 이즈음 읊조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장들이다.
<우리는 놀라운 삶을 살아간다. 삶 자체가 경이롭기 때문이다.>
<상실은 일종의 외부적 의식으로, 우리에게 유익한 날들을 잘 사용하라고 한다.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고, 인생을 잘 산다는 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경의를 표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상을 돌보고,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과 이미 사라진 것들을 포함한 이 모든 것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우리는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보기 위해 여기 있다.>
가을의 초입, 나뭇잎들은 물들기 시작했고, 성미 급한 녀석들은 이미 떨어져 뒹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을 빛에 더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들도 있고, 이제 막 피려고 봉오리 맺는 놈들도 있다.
“연휴에 뭐 하슈?” 친구가 물었던 일은 제법 오래 되었다. 거의 잊고 있다가 일주일 전쯤 “가까운 곳에 가서 하루 걷고 먹다 옵시다.”라는 그의 말에 “어이, 좋지”했었다.
그가 말한 가까운 곳은 딸네와 가까운 곳이었다. 하여 딸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아빠가 연휴 하루 하나엄마 아빠랑 너 사는 근처에 가는데… 얼굴 한 번 볼 수 있을까?’ 딸아이의 물음, “어디?, “맨하턴하고 브루클린”이라는 내 응답에 이어진 딸 아이의 대답이었다. “어떻하지…. 우린 그때 서부에 있을텐데…. 친구 결혼식에…. 아이….”
연휴가 다 끝나는 저녁 무렵, 딸아이가 연락을 해왔다. “우린 이제 막 집에 돌아왔어. 엄마 아빠 뉴욕구경 어땠어?”
친구는 뉴욕과 뉴저지와 델라웨어를 매주 생업을 위해 오간다. 모두 그가 오늘을 살아가는 동선이다. 뉴욕 나들이는 어쩌면 그에게 나들이라 할 수도 없을게다. 그가 오늘을 살아가는 현장이므로.
우리 내외에게 도시는 이미 어쩌다 구경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붐비는 사람들, 어지럽게 높은 건물들과 귀가 멍멍하여 머리속이 아득해지는 소음들 이젠 아주 낯설어 보이는 것들이 모두 구경거리가 된 관광지이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 거의 하루가 넘어가는 시간에 돌아온 하루 여정, 많이 걷고, 많이 보고, 많이 먹었다, 무엇보다 친구내외와 우리 내외 모처럼 끊이지 않은 살아가는 이야기들, 그 수다 삼매경에 빠져 지낸 하루가 참 좋았다.
하루가 지난 밤, 딸아이가 건넨 물음은 우리 내외가 누린 연휴에 큰 감사를 덧입혔다. 딸아이는 이즈음도 묻고는 한다. “아빤, 언제 일 그만 둬?”, 언제나 똑 같은 내 대답, “글쎄…. 아직은….”
우리 내외가 함께 하루 온종일 이야기를 나누어도 아쉬운 친구내외가 있고, 뭐라해도 그저 품어낼 가족들이 있고, 우리 내외 아직 걸을만하고… 하여 몸과 맘으로 하는 모든 일들은 쉬지 말아야 하고….
‘김민기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부르는 작은 음악회’에 왕복 세시간 운전을 하며 다녀왔다. 정말 조촐하게 작은 음악회였지만,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내가 누린 소망은 밝았고, 희열은 매우 컸다.
노래 부르는 이들을 쫓아 따라 입을 떼며 옛 생각들이 마구 스쳐 지나 갔었다. ‘검푸른 바닷가에….’ 그 친구를 따라 부르며 내 스무살 언저리 친구들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고, ‘금관의 예수’를 따라 부르며 종로 오가 기독교회관를 드나들던 내 청년 시절 한 때의 벗들을 떠올렸으며, 노래극 ‘공장의 불빛’ 가운데 ‘이 세상 어딘가에…’를 읊조리면서는 동일방직과 YH공장 사십 수년 전 당시 내 또래 누이들의 고통스럽던 모습들을 떠올렸었다.
‘철망 앞에서’와 ‘천리길’을 이젠 잘 나오지 않는 목청을 뽑아 따라 부르면서는 이 이민의 땅에서 조국 통일과 평화를 위해 삶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다 떠나신 필라 우리 친구들의 어른 장광선선생도 떠올렸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이즈음도 우리 내외가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곧잘 함께 흥얼거리는 노래여서 정말 좋았다.
언제나 흥에 넘치는 아내도 한 곡을 택해 불렀다. ‘그 사이’였다. 김민기선생이 1972년도 만든 노래이니 내가 대학 입학을 했던 해이며, 유신 계엄이 일어난 때였다.
그 사이 – 1972년에서 2024년, 자그마치 52년 이라는 세월의 간격 사이엔 숱한 사건들과 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1979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꿈을 찾다가 스러지며 그래도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싸우’자던 동일방직 YH 그 누이들 뒤를 이어 일어난 부마항쟁 끝에 박정희 유신독재는 끝이 났었다. 그 때 누이들의 참담했던 기록들을 아현동 굴레방다리 아주 작고 초라했던 내 출판사에 작은 책자로 펴낸 기억도 떠올랐다.
그리고 1987년 그 뜨거웠던 여름, ‘아침이슬’로 뒤덮여진 신촌에서 시청앞까지 뚜벅뚜벅 걸었던 날도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
순간 솔직한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1979년 그때처럼 전두환 독재가 그리 무너질 지는 몰랐었다.
그랬다. 8.15 광복, 4.19 며칠 후 이승만의 몰락, 박정희의 비참한 죽음, 전두환 그 비굴한 끝을 당시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었다. 언제나 그랬듯 몰락의 징후들은 차고 넘쳤지만, 세상을 덮고 있는 권력과 비굴한 아부꾼들과 무지한 맹종자들과 하루 입에 풀칠하기 바쁜 사람들이거나 제 살 길에 바쁜 사람들에겐 그 날이 그리 빨리 올지는 몰랐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정말 많은 것들이 좋아지고 밝아졌다만, 권력에 이르면 그 어떤 분야의 권력이든 이승만이래 문재인정권까지 모든 정권에서 보아왔던 비겁, 비열, 무지, 무능, 사악 나아가 반통일, 반평화, 친일을 넘어 숭일 매국 정신으로 똘똘 뭉쳐진 놈들의 세상처럼 다가오곤 한다. 한국 뉴스들이.
허나 역사의 반동들이 기세를 마음껏 부리는 세상을 바라보니 그 끝과 몰락이 눈에 보인다. 숱한 징후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하여 그 사이 – 별거 크게 변한 것 없다. 사람 같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곧 올게다.
김민기선생이 꿈꾸던 내일의 아이들을 위한 꿈에 무대가 펼쳐지는 세상이 말이다. 그래서 희망이다.
오늘 그 작은 음악회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준 필라의 아름다운 친구들에게 감사를 보내며.
이른 아침 가게로 들어선 Rose씨는 아내 Anita가 떠났다고 했습니다. Rose씨 내외는 서른 해 넘는 우리 가게 오랜 단골입니다. 유태계 은퇴 의사인 Rose씨는 최근 몇 년 사이 걸음걸이가 영 불편합니다. 걷는 모습이 그저 아슬아슬하답니다. 그의 아내 Anita가 그보다는 훨씬 건강했답니다. 한 두해 전부터 이런 저런 병치레로 병원 나들이가 잦던 Anita가 그만 먼저 떠났답니다.
그가 예의 그 아슬아슬한 걸음으로 가게문을 나서면서 울먹이며 제 아내에게 던진 말이랍니다. “Anita가 여기와서 당신하고 얘기하는 걸 참 좋아하고 즐겼었는데….”
한 오륙 년 되었나 봅니다. 해마다 오랜 단골 분들 가운데 몇 몇은 꼭 떠나십니다. 허긴 한 자리에서 한 세대 훌쩍 넘긴 세월을 보냈으니 아주 당연한 일일겝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이 이상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남편을 잃은 할머니들은 대개 덤덤하게 그 일을 전하시는데 비해, 아내를 잃은 할아버지들은 맥없이 슬픈 얼굴이 되곤 한답니다.
혼자되신 할머니들은 제법 오랜 동안 뵐 수도 있거니와 밝은 편인데 비해, 혼자되신 할아버지들은 더는 그리 오래 볼 수 없을 뿐더러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남기곤 한답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랍니다.
하여 혼자 읊조려보곤 한답니다. ‘언젠가 그때가 되면….내가 먼저….. 아무래도 그게 맞는 일인데…. ‘
둘
해마다 이 맘 때이면 삼 십 수 년 동안 똑같이 겪는 일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입학과 개학 시즌이 되면 교복을 입어야만 하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엄마나 할머니와 함께 가게를 찾는 답니다. 교복을 제 몸에 맞게 고치려고 오는 것이지요.
해마다 꼭 겪게 되는 일이란 바로 엄마와 딸 또는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와서는 교복 치마 길이를 줄일 때 벌어지는 다툼이랍니다.
딸이나 손녀는 할 수 있는 한, 짧게 줄여 달라고 주문을 하고 엄마나 할머니는 될수록 길게 해달라고 요구를 한답니다. 언제나 무릎이 경계이지요. 아이들은 무릎 위 한 뼘쯤 위로 요구를 하고, 어른들은 무릎을 덮을 정도로 주문을 하지요.
그럴 때면 참 여러 서로 다른 다툼들을 보게 되곤 한답니다. 딸과 어머니나 할머니와 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볼 때도 있고, 아이들 입이 쉬지 않고 불만을 토해내도 전혀 들은 체하지 않는 어머니를 보기도 하고,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어쩌겠수’하는 할머니도 만나게 된답니다.
그런데 또 이런 경우도 있답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가서는 저희에게 전화를 주는 어른도 있답니다. ‘그래요. 제가 책임질 거고요. 아까 제 아이가 원했던 길이보다 몇 인치 길게 해 주세요.’라고 당부하는 것이지요.
해마다 이 맘 때 겪는 변치 않는 풍경이랍니다.
삼 수 년 전 그 때의 딸이 지금은 엄마 아니 할머니가 되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그 풍경은 전혀 변하지 않는 답니다.
셋
해마다 ‘덥다 더워’, ‘춥다, 추워’를 후렴처럼 중얼거리고 사는데, 꽃들은 저마다 때 맞추어 봉우리를 맺고, 피고, 지곤 하지요. 아무 말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