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한국학교

비교적(?) 제 말을 잘 들어주는(?) 아내가 몇 년 동안 제가 노래를 불러도 들은 체도 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내가 35년째 하고 있는 주말학교 델라웨어 한국학교 선생입니다.

‘이젠 그만 마쇼! 오래 했잖아! 이젠 젊은 사람들이 해야지!’하는 내 말은 족히 오 년은 이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아내는 그야말로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 델라웨어 한국학교 종업식이 있었던 날입니다. 종업식 겸 학예회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이런 저런 행사 영상을 보여주며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그저 좋아 보입니다.

이젠 전에 가르치던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되어 데리고 오는 아이들과, K-pop과 K-drama에 빠진 비한국계 성인 학생들에게 한국말과 한국무용을 가르칩니다.

오늘 학생들에게 받은 한아름 꽃다발을 화병에 꽂은 후 좋아라 하며 사진을 찍으라고 명령(?)하는 아내를 보며, 교육성과나 아내의 나이는 따질 필요 없이….

그냥 할 수 있는 날까지 제 말은 듣지 않은 게 좋을 듯 하답니다.

(학예회 한 장면과 한 학생의 가족소개 영상입니다.)

아쉬움과 고마움

홍길복목사님 – 기억컨대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고작 두 해 남짓이 모두다. 그것도 내 스물도 저물던 시절이었으니 사십 수 년 전 일이다. 그 후 오랜 시간 그는 호주에서 나는 미국 시골에서 살며 딱 두 번을 만났었다. 십 수년 전 내가 사는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지난 해 서울에서였는데, 두 번 다 그저 밥 한끼 나누는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홍길복목사님 – 그는 내 신앙의 인도자요, 인생의 선생인 동시에 늙막에 신 앞에 다가서는 날들을 준비하는 정신적 길 벗이다.

홍길복목사님 – 내 어리고 젊었던 시절, 성서와 예수에 대한 숙제를 던져 주셨던 그는, 지난 세월 비록 서로 만나지는 못할지 언정 끊임없이 나를 깨우게 해 주셨다. 그의 설교문을 보내주거나 생각의 단편들을 전해오거나 지난 십여 년 동안은 그가 이끌어 온 <시드니 인문학교실> 강의안을 보내주어 나를 깨웠다. 그 강의안으로 내가 사는 곳에서 함께 하는 친구들의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게 하셨다.

홍길복목사님 – 그가 엊그제 설교문을 보내어 또 나를 깨웠다. <삶의 후회조차 감사할 때>라며.

그가 설교문을 보내주시면서 덧붙인 말씀이다. < 첨부한 설교문은 오는 주일 시드니우리교회 목사님이 출타를 하면서 설교를 부탁하시길래 준비한 것인데, 돌이켜보니 마침 이즈음이 제가 목사안수 받은지 50년이 되어서 그에 따른 소회를 써 본 것입니다. 인생이란, 목회란, 관계란 모두가 다 아쉬움과 고마움으로 남는 것이군요.>

그저 홍목사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하나님 앞에선 그의 고뇌와 감사를 나눌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그의 허락도 없이 여기에….


<홍길복의 목사안수 50년 감사예배 설교>

  • 2024년 5월 19일 , 시드니 우리교회

오늘의 말씀 : 시편 116편 12절 -14절

오늘의 제목 : 지난 날을 되돌아 보니 – 아쉬움과 고마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강이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넘쳐나시길 기원합니다.

앞에서 예배순서에 따라 맡으신 분이 읽어주신 성경말씀 이지만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더 읽겠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새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행하겠습니다.> 이 시편 116편은 누가 지은 것인지 그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주제는 아주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든, 아니면 민족적으로든 <죽다가 살아난 사람의 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 후에 고백한 시>로써, 죽음으로 부터 다시 생명을 얻은 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편 116편을 주석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오스트랄리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시가 이 땅 호주에서 어떻게 처음 읽혀졌던지를 말씀드린 후 저 개인적 간증의 말씀을 나누고자합니다.

먼저 역사 이야기입니다.

1783년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식민지 북미 대륙을 잃어버린 영국은 마침 몇해전인 1770년에 James Cook이 발견하여 영국의 식민지라고 선포해 두었던 남태평양의 거대한 섬 나라 호주를 미국을 대신 할 만한 새로운 식민지로 여겼습니다. 산업혁명 후 넘처나는 사회문제로 범죄는 증가하였고 죄수들을 수용할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마침내 영국정부는 새로운 땅, 미지의 남쪽 나라인 호주를 그들 나라에 있던 Wales주를 대신할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여 <남쪽에 있는 새로운 Wales주>라는 뜻으로 New South Wales주라 이름 붙여서 이곳으로 죄수들을 실어 보내기로 했습니다.

영국은 1787년 5월 13일 런던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Portsmouth에서 군함 2척, 화물선 3척, 그리고 수인선 6척, 총 11척의 선단을 꾸려 군인들, 죄수들, 자유 이주자들을 섞어 호주로 보냈습니다. 이를 가르쳐 역사는 <The First Fleet, 제 1차 선단>이라고 부릅니다.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1차 선단에는 죄수들 789명을 포함하여 군인들과 자유 이주자들을 합해서 모두 1420명이 승선하였는데 그만 그 긴 항해 중, 배에서 사망한 사람이 48명이나 생겨서 시드니에 도착한 인원은 모두 1372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가 바뀌어, 이듬해, 1788년 1월 26일이 되었습니다. The First Fleet는 2만 5천 km, 250일에 걸친 긴 항해 끝에 마침내 Sydney Cove, 시드니 내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들은 이날, 1월 26일을 Australia Day, 호주 건국기념일로 지키고 있는데, 과연 이날이  호주의 <건국 기념일, Australia Day>가 맞는냐? 하는 데는 적지 않은 반론도 있습니다. 본래 호주는 주인 없는 빈 땅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50여만명이나 터를 잡고 수 만년을 살아왔던 주인이 분명한 땅이니, 이날 1월 26일은 Australia Day가 아니라 <오스트랄리아 침략의 날, Australia Invasion Day>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기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더 나누지 못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싶이 The First Fleet를 이끌고 온 선장 겸, 초대 New South Wales 주총독은 Arthur Phillip이었고, 그 때 그들과 함께 온 군목은 영국 성공회 신부, Anglican Chaplin, Richard Johnson 목사였습니다. 그들이 시드니 항구에 닺을 내린 1월 26일은 토요일이었고 그 다음 날인 1월 27일은 주일이었지만 그들은 예배를 드릴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배를 접안하고, 짐을 내리는 등 그들이 이 미지의 땅 시드니에 상륙 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 The First Fleet를 타고 온 사람들이 이 땅 오스트랄리아에서 맞이한 첫번째 주일은 한 주일 후인 2월 3일이었습니다. 1788년 2월 3일 주일 아침, Richard Johnson 목사님은 Circular Quay에서 한 불록 떨어진 지금의 Bridge Street 앞 Macquarie Park 에서 10시가 되자 예배 시간을 알리는 북을 울렸습니다. 사람들은 모여들었습니다. 항해사들과 군인들, 남녀 수인들과 아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Aborigine들의 땅, 기독교와 그 예배의식이라고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고, 접해 본 일도 없는 신비의 땅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식 예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참 안탑갑게도 1788년 2월 3일 아침 10시 – 호주 땅에서 하나님께 드린 첫 예배때 불렀던 찬송이나 드린 기도문이나 전하신 설교 말씀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는 바로 그날 봉독했던 성경말씀입니다. – 시편 116편 12절로 14절 –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세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행하겠습니다.> 이는 오스트랄리아 땅에서 처음으로 읽혀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50일에 걸쳐 25000Km나 되는 죽음의 항해길에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살려주시어 육지에 발을 딪게 해주시고 새로운 꿈과 가능성과 희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이 진솔한 고백과 노래가, 저는 이 땅, 이 호주의 모든 오고 오는 세대와 다민족들의 주제가가 된다고 믿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세한 것은 이제 이후 이땅에서 다 지켜 이행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이제 부터는 부족한 저의 고백과 간증을 나누고저 합니다. 지난 5월 8일은 제가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이 직분을 받은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68년 일반대학을 거쳐, 1972년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저는, 1973년 서울 신촌에 있는 대현교회에 전도사로 부름을 받았는데 감사하게도 그 교회가 저를 서울 서노회에 부목사로 청원해 주셔서 1974년 5월 8일, 수색교회에서 열린 제 10회 서울 서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후 저는 대현교회에서 만 6년을 부목사로 일하다가 1980년 6월 호주 Uniting Church 세계선교부 총무 변조은목사님의 초청을 받아 이곳으로 왔습니다.

처음 저희는 Uniting Church, West Australia Synod에서 사택과 자동차 등을 마련해 주셔서 서부 호주 퍼스에서 한 6개월을 머물면서 간단한 영어도 익히고 자동차 운전면허도 따는 등 호주 정착을 준비하면서 퍼스에 처음으로 한인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때 퍼스에서 함께 <서부호주 한인교회>를 일구어 온 사람 중에는 지난 44년을 함께 해온 남정율집사님이 지금까지도 저희 곁에 계십니다. 6개월 이라는 짧은 기간을 퍼스에서 지낸 후 저희는 1980년 12월 시드니에서 막 시작된 <시드니 제일교회>의 초청을 받아 목회와 삶의 자리를 이곳 시드니로 옮겨 1998년 말까지 18년을 그 교회에서 사역한 후, 1999년 1월 부터는 <시드니 우리교회>로 옮겨 14년을 목회하다가 2012년 말 모든 일선목회에서 은퇴하였습니다.

이제 부터는 염치도 없이 뻔뻔하게 부끄러운 이야기는 쏙 빼버리고 제 자랑을 좀 늘어놓겠습니다. 호주에서의 세 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는 동안 저는 호주 Uniting Church와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총회나 노회를 비롯하여 한인교회교역자회 등 여러 섬김의 자리에서 일하기도했고, SCD 한국어 학부와 모스크바 장신대, 인도네시아 신학교 등 국내외 몇몇 신학교육기관에서 가르키기도 했습니다. 저의 목회 기록에 의하면 저는 지난 이민목회 33년 동안 919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170번의 결혼식, 67번의 장례식, 1500번 이상의 주일 예배 인도와 설교, 약 9000번의 심방, 1600회 이상의 상담, 그리고 1200회 이상의 각종회의를 주제하기도 했고 또 참석했습니다. 수많은 기도회와 성경공부 인도,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선교 음악제를 비롯한 많은 행사와 이벤트들, 일일히 세기도 힘든 부흥회, 초청설교, 신학 특강, 세미나, 선교지 방문, 초기 2년 동안 진행한 SBS 방송, 300개가 넘는 각종 칼럼과 기고문들, 그리고 7권의 책을 출판을 했습니다. 무엇 보다도 저는 이민목회 33년을 통하여 줄기차게 예수를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민자로 풀어 왔습니다. <이민자 예수>라는 책도 쓰고,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하고, 세미나도 하면서 그야말로 기를 써왔습니다. 장신대 최윤배교수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입문>에서 홍길복을 남태평양을 중심한 디아스포라 신학과 실천의 한 모델로 길게 서술하기도하고 이를 장신대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자화자찬하며 잘 차려 놓은 진열장 처럼 길게 늘어놓은 허풍과 허세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인간 홍길복, 목사 홍길복의 정직한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젠 목사가 된지 반세기, 50년이나 되지 않습니까? 주님 앞에 설 날도 점점 가까와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좀 솔직해질 만한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많이 부끄럽기는해도, 그래도 이젠 좀더 자신에 대해서는 정직해지고, 하나님 앞에서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며 무릎 꿇고 항복하는 인간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이가 되어 지난 날을 돌아보며, 홍길복이 살아온 인생과 목회자의 길을 회상해 보니, 하나는 <후회>요 다른 하나는 <감사>입니다. <아쉬움>과 <고마움>이 교차 됩니다.

먼저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드립니다.

50년전, 1974년 5월 8일, 목사 안수를 받던 자리에서 저는 참 많이, 정말, 아주 많이 울었습니다. 뜨거운 감격과 함께 제 가슴 속에는 처절한 다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께서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길, 저도 잘 따라 가겠습니다> 눈물로 약속하고, 가슴으로 다짐하고, 기도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저는 그 때의 약속과 다짐과 기도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실패한 인간이요,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누가 세워준 것이든,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세운 것이든, 출발 할 때, 처음 시작할 때 세웠던 목표와 꿈과 이상을 이루었으면, 그것은 성공한 것이고, 끝내 그걸 이루어 내지 못했다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돈 많이 벌겠다>고 목표를 세웠는데 돈을 많이 벌었으면 성공한 것이고, 돈을 많이 못 벌었으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권력을 잡아서 출세하겠다>라고 목표를 세웠는데 그렇게 했으면 그것은 성공한 것이고 끝내 그걸 이루지 못했다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내 인생의 꿈>이라고 목표를 세웠었는데 그걸 이루었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고 이루지 못했으면 그건 실패한 인생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겠다. The Man for Others! 꼭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리라!> 목사로 안수 받을 때, 저는 그렇게 인생과 목회의 목표를 세웠던 사람이었는데 끝내 그걸 이루어 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50년 전, <예수님께서 가신 길,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길을 따라 가리라> 결심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끝까지 그 길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처음 출발할 때 세웠던 목표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어영구영 헛된 것들만 바라보면서 50년의 세월을 흘러 보내고 말았습니다. 세속적이며 직업적 종교인으로써 기능적인 능력은 어느 정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부르신 소명에는 끝까지 충성하지 못했고, 다짐했던 목표에는 이르지 못한 실패한 목사입니다.

목회란 일생을 통하여 쉬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목회란 사실 사랑 이상도 아니고 사랑 이하도 아닙니다. 목화란 사랑의 연습이고,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의 확대 재생산입니다. 목사라는 사람은 평생을 통하여 예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자신의 삶으로 그 예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사랑을 주어야 할 의무만 있지, 사랑을 받을 권리는 처음부터 없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 다른 사람의 비극과 슬픔을 덜어주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은 목회자가 될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않됩니다. 억울하게 죽으리라 각오한 사람만이 가는 길이 목회자의 길입니다. 목회자의 모델인 예수님이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구조 속에서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고 교회를 성장시켜 성공한 목사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공동묘지에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서 그걸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않되는데, 저는 교회 크게 하고, 세례 많이 주고, 행사 많이 하고, 설교 잘 하고, 책쓰고, 방송하고, 부흥회 인도하고, 교회를 양적으로 크게 만들면 그게 성공이요, 성장이요, 잘난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후배 목사들이 <목사님, 목사님은 목회에 성공하셨습니다. 존경합니다> 그리 말하는 것을 잘못 알아들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오신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말은 하면서도, 권위주의적 생각에 사로잡혀 대접을 받는데만 익숙했고 남에게 시키는데만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는 커녕, 일년에 몇번 장로님들과 주일하교 어린이들 몇몇을 강대상 앞으로 불러내어 발을 씻어주며 <세족식>을 하는 것이 마치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인 양 착각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주며 발을 씻어주라는 실천적 교훈을 종교적 의식, 종교적 Liturgy로 바꾸어 놓고 세족식을 하는 것이 진짜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인 양 저 자신을 속여 온 위선자입니다. 지난날 저의 목회는 고객관리라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고 의무로 한 일은 결코 목회라고 이름 할 수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의 가난하고, 병들고, 아파하는 사람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 까지도 목사의 책임입니다. 목사는 사랑에 대하여 무한 책임을 진 사람을 부르는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을 영접토록 이끄는 것이 바른 목회인데 <세속적 방법으로 거룩한 일을 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나 또한 주님 가신 길 따르리라 눈물로 다짐하고 50년 전에 목사가 되어 사랑과 섬김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고 목사로 안수를 받았는데, 아 ! 글쎄 말입니다. 지금 와서 지나 온 길을 되돌아 보니 저는 그져 그 예수님을 이용하여 월급 받아 잘먹고 잘살면서, 칭찬받고, 이름 내면서 <목사님, 목사님> 소리 들으면서 살아온 그렇고 그런 인간이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기 전에 저에게는 꼭 드려야만 할 마지막 한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말씀입니다.

가깝게는 하늘나라에 가 계신 저의 양가의 부모님들부터 제 아내와 아이들과 동생들과 일가와 친척들에게 빚진 것은 말로 다 할수가 없습니다. 수 많은 동역자들과 친구들과 선후배 신학도들, 더불어 이 인생길과 신앙의 길을 함께 동행해 주신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무엇이라고, 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과 호주에서 지난 80여년을 함께 동고동락 해주신 분들, 50년 전 목사로 안수 받도록 이끌어 주셨던 대현교회의 옛 어른들과 오래된 친구들로 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허물 많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 저를 감싸 주시고 손잡아주신 서부호주 한인교회, 시드니 제일교회, 그리고 시드니 우리교회의 여러 교우들과 은목회 식구들과 인문학 친구들을 포함한 많은 호주 디아스포라 이민자들과 동역자들에게 저는 죽어도 결코 다 갚을수 없는 은혜와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온 몸이 다 입이 되어도 말 가지고서는 다 감사드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감사와 함께, 아니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가장 크고 뜨겁고 드리는 감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이제는 사실 성공이나 성취만이 아니라 실패와 부끄러움 까지도 감사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깨닫습니다. 인생이란 <목회이든, 학문이든, 사업이든, 정치이든, 봉사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사람의 계획과 의지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인생이란 살고 싶다고 해서 살수있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달려있습니다. 뒤늦긴 하지만 이제라도 이것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 최대의 깨우침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서 주어진 삶의 일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살다가, 감사하면서 죽는 것>입니다.

죽음의 때, 마침의 순간이 점점 가까워 오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감사가 인생 최대의 의무요, 동시에 승리인줄을 모른다면 그는 참 슬픈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이를 깨우쳐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말씀을 마칠려고 합니다. 마치 25000Km, 250일, 길고 긴 항해 끝에 시드니에 도착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구원의 잔을   높이 들어 감사의 노래를 불렀던 Richard Johnson목사님 처럼, 저도 지난 50년 목회 길과, 80년  인생길을 한결같이 옆에 계셔 주시고, 인내로 참아주시고 붙잡아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의 실패와 갈등 까지도 진솔하게 고백하게 해 주신 주님, 지난 날 목회의 아쉬움을 넘어, 그 때는 그렇게 잘못했지만 이제라도, 죽기 전에, 그걸 깨달아 알게 해 주시어 그것 까지도 감사로 승화 할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께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236년 전 Johnson 목사님이 이 땅 호주 시드니에서 처음으로 읽으셨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여기에서, 저는 저 자신의 영혼의 고백으로 주님께 올립니다

<주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제가 무엇으로 다 갚을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뿐입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길에서나마 지난날 주님께 다짐했던 서원을 갚아드리도록 힘을 다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오! 늘~

어머니날이라고 딸아이가 꽃을 보냈다. 기억컨데 딸아이가 직장을 얻어 집을 떠난 이후 기억할만한 날이면 꽃 보내는 일을 잊은 적이 없다. 꽃 선물을 받을 때면 내가 늘 궁시렁 거리는 변치않는 소리다. ‘지 쓰기도 바쁜데 뭐 이런데 돈을 쓴 담!’ 허나 꽃배달이 조금 늦어지는 날이면 아내보다 내가 조바심을 내는 편이다.

한 두 해 전쯤이던가? 딸아이가 내게 물었었다. ‘아빤 이제 일 그만둘 때 되지 않았어? 일 언제까지 할꺼야?’, 잠시 머뭇거리던 내 대답이었다. ‘글쎄…. 일 할 수 있을 때까지…’ 그 대답에 딸아이는 ‘왜?’라고 다시 물었다.

‘Why?’하고 묻는 딸아이의 몸짓과 얼굴 표정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내색과 그런 나를 마치 나무라는 듯한 속내를 담고 있었다. 이어진 딸아이의 주문이었다. ‘일 많이 했잖아! 이젠 좀 쉬고 엄마랑 여행도 좀 다니고….’ 그쯤 나는 적당한 타협안을 내 놓았었다. ‘일 좀 줄이고, 일하며 여행 다닐 계획은 있어.’

딸아이는 어릴 적 내 세탁소를 ‘아빠 집’이라고 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나는 아들과 딸에게 그저 미안하다는 맘이 크게 저며온다. 아이들이 한참 자랄 나이에 좀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미안함이다.

그 무렵 내가 자는 시간 빼놓고 모든 시간을 보냈던 세탁소 일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할 수 만 있다면 빨리 세탁소 일을 벗어나고 싶었었다. 이따금씩 들었던 이웃과 지인들이 건넸던 뜻없이 지나가는 인사말, ‘당신은 세탁소 하기엔 참 아까운데…’라는 풍선 같은 말에 혹해 여러 해 들떠 지내다 낭패를 본 부끄러운 시간들도 있었다. 그 모든 시간을 되새기면 무엇보다 난 아이들에게 미안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내 세탁소에서 나는 내 천직을 받아 들였다. 그 이후 손님들에게 듣는 말들, ‘너희 세탁소가 우리 동네이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너희 내외 웃는 얼굴 보러 온다….’

오늘 하루만 해도 그랬다. 평소 성질 고약한 손님 하나 찾아와 눈물 흘리며 하던 하소연… ‘아이고 글쎄 내가 유방암이란다… 아이고 어쩜 좋니…’ 그 하소연 한참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걱정마! 괜찮을거야. 기도할게’라는 말에 환한 미소 지으며 떠난 얼굴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려 보는 말, ‘그래 아직은 더 일 할 나이지!’

‘오늘’이라는 말을 ‘오! 늘~’이라고 풀어 주셨던 이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선생님이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루(오늘)만이 영원히 있는 것이다. 오늘의 ‘오’는 감탄사이고 ‘늘’은 언제나 항상이라는 뜻이다.>

글쎄… 언제까지 내가 세탁소 일을 계속할 수 있을런지 모를 일이다만, 하는 날까지는 ‘오! 늘~’이라는 맘으로 감사하며 할 일이다.

딸아이에게 해 줄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아내와 함께 여행도 한 번 떠나야 할 터.

아이가 보내 준 꽃이 시들 때까지 아내는 손님들에게 말하겠지. ‘제 딸이 제게 보내 준 꽃이랍니다.’

철들기

아직도 철들려면 멀었나 보다. 마음은 이미 저만큼 가 있건만 몸은 어찌 그리 더딘지. 이젠 몸 뿐 아니라 말조차 어눌해 진다는 느낌이 들 때면 공연히 맥이 풀리곤 한다. 다 철이 안든 탓일게다.

암투병으로 부쩍 늙어버린 오랜 단골 손님이 환하게 활짝 핀 얼굴로 가게를 찾아왔다. 세탁물과 함께 앙증맞은 호접란 화분을 선물로 주고 갔다. 맞아! 나는 아직 철이 덜 들었음에 틀림없다.

모처럼 개인 하늘 아래 오후, 서로들 이 계절의 주인이라고 뽐내는 내 뜰의 꽃들을 보며 몸과 맘의 속도를 맞추다. 신기하기도 하지. 물 주고 거름 주고 정을 준 꽃들보다 그냥 자란 꽃들을 보며 속도를 맞추었으니.  그래…. 나도 언젠가는 철이 들겠지.

내 가게 뒤쪽으로 나들이 온 오리가족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 하나. “흐음, 더는 새끼일 수도 없고…. 애비 애미도 아니고….”

난 여전히 뒤뚱거릴지라도 이젠 철들 나이임에 틀림없다. 삶에.

사람답게

편안하던 마음이 세상뉴스와 마주하면 뒤죽박죽 엉망이 되곤 한다. 특히나 내가 알고 이해하고 있던 말들이 전혀 다르게 쓰이고 있는 소식들을 듣고 보노라면 참담한 마음으로 뉴스들의 속내를 파보곤 한다.

그런 오늘을 사는 답답한 마음으로 손에 든 책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미하엘 슈미트 살로몬(Michael Schmidt Solomon)이 쓴 <어리석은 자에게 권력을 주지마라>이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사람에 대한 저자의 사뭇 도전적인 단언적 주장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화려한 별칭을 부여했던가. 호모 압스콘디투스Homo absconditus(신비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미학적 인간), 호모 크레아토르Homo creator(창조적 인간), 호모 이노바토르Homo innovator(독창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유희적 인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화자찬의 절정이자 고상한 우리 인간류를 공식적으로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현명한 인간)가 있다. 별로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말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재미있는 농담일 것이다.>

<인간에게 훨씬 적절한 명칭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호모 데멘스 Homo demes, 즉 광기의 인간이다.>

이어지는 그의 인간의 하찮음을 증명하려는 듯한 이야기들은 조금 불편할 수도 있다. 나처럼 교회 마당에서 뛰놀며 자란 이들에겐 더욱 그러할 듯.

그러나 그가 풀어내는 광기 서린 인간들이 만들어 냈던 지난 사람살이 이야기들에 빠져 들다 보면 밑줄 긋지 않는 문장이 몇 개 되지 않을 정도로 취하게 된다.

그가 광기 서린 인간들의 어리석음으로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분야의 첫 번째로 꼽은 것은 종교다.

그는 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악행은 인간이 범하는 온갖 병폐 중에서도 가장 고질적인 망상이라고 단언하다. 그가 예시로 들은 여러 종교적 광기들은 내가 살아오면서 익히 듣고 보고 배운 사실들이다.

그 다음은 경제, 곧 소비지상주의 시대의 권력이 된 자본시장에서 나타나는 인간들의 광기, 곧 어리석음이다.

이어지는 광기서린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문화, 교육 분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인간들의 광기,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절정을 이루는 곳이 정치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했던 모든 형태의 바보 같은 짓, 이를테면 어리석은 종교, 어리석은 생태행위, 어리석은 경제행위가 정치의 영역에서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메가톤급 어리석음, 즉 어리석은 정치 행위로 통합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이런 어리석은 정치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그의 고언이다. <씁쓸한 사실은 민주주의의 모든 권력과 어리석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호모 데멘스 Homo demes, 즉 광기의 인간을 벗어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곧 현명한 인간이 되는 길이 있다고 제시한다.

바로 어리석은 자들에게 종교, 경제, 문화 교육, 정치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내어 주지 않기 위해서 <도덕적 분개가 아니라 문화적 어리석음으로부터의 탈피>를 외치고 실천하는 일이다.

그는 이런 일들에 대해 낙관하는 이유로  “지성의 목소리는 낮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쉬지 않는다. 수없이 퇴짜를 맞은 뒤, 마침내 지성은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인류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다.”라는 프로이드의 성찰을 소개한다.

또한 <이제는 완전히 어리석은 자에게 조종간을 넘겨주는 행위가 무책임한 일이 될 정도로 인류의 행보는 문화적으로 진보했고, 과학기술과 국제화를 통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의 권력을 깨뜨릴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권한다.

책을 덮으며 답답했던 마음들이 많이 사라졌다. 살아 숨쉬는 한, 어리석음을 벗어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참 많다는 생각으로.

– *역자인 김현정이 번역한 책들 제목에 혹하여 몇 권을 주문하다.

이른 봄과 늦은 봄 사이를 가르는 비가 온종일 내리는 주일에.

흙과 재미

어느새 다섯 해 전 일이 되었습니다. 그 해 일월, 장인이 세상 떠나실 때만해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아주 먼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장인의 장례는 준비했던 대로 많은 이들이 함께 하는 가운데 떠나시는 어른께서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치루었지요.

이월이 되자 우리 동네에도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가 나왔다는 소식이 동네 신문을 크게 장식 했었답니다. 그리고 삼월이 되자 주를 넘나드는 여행에 이런저런 제약들이 생기더니만, 급기야 생활에 아주 필수적인 영업행위를 제외하곤 모든 영업을 중지하라는 주정부의 명령이 떨어졌지요.

그 해 이 맘 때인 오월 어느 날, 어머니께서 떠나셨지요. 아흔 세 해 여행길 마치시고 떠나시던 날, 어머니의 마지막 날숨은 아직도 제가 느낄 만큼 편안하게 다 내려 놓으신 듯한 여운으로 남아 있답니다.

어머니의 장례는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서 치루어야 했답니다. 집례 목사님들과 가까이 사는 우리 남매들 부부들 그리고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던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몇 분들이 모여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었지요. 멀리 사는 여동생내외와 어머니의 손주들, 증손주들은 Zoom Meeting으로 , 장례예식을 마친 후, 교회당 앞에 세워 둔 어머니의 운구차를 향해 예식을 함께 하지 못한 교인들이 각 자의 차안에서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아주 독특한 사치까지 누리시며 어머니는 떠나셨답니다.

그게 벌써 다섯 해가 지난 일이랍니다.

제 삶의 재미가 바뀐 때는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하루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는 삶을 이어오던 제게 코로나 바이러스는 갑자기 무료하게 긴 시간을 던져 주었습니다. 가게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게 차고 넘치는 것은 시간 뿐이었습니다.

특별히 가진 재능이나 취미 따위가 없는 제게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남는 시간들이 주어지자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알 수 없는 불안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해 봄이 다 갈 즈음, 문득 제 눈에 들어 온 것은 흙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많은 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 때까지 전혀 몰랐었답니다. 한 뼘 땅속 흙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재미를 미처 몰랐었답니다.

흙을 뒤엎어 숨 쉬시게 하고, 흙이 품을 씨앗과 모종과 묘목을 안겨 주고, 물을 주면 흙은 놀랄만한 창조물들을 보란듯이 내어 놓곤 하는 그 재미에 훅 빠져 다섯 해를 보낸 듯 합니다.

오년 전 갑자기 다가 온 남는 시간에 대한 불안은 이젠 부족한 시간에 대한 불만으로 바뀔 만큼 흙이 주는 재미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흙과 노는 사이에 점점 더 흙과 가까워지는 나이로 나아가곤 있지만, 이렇게 나이 들어 간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랍니다.

이른 봄꽃들을 거둔 흙들은 이젠 철쭉, 알리움, 라이락, 장미 등 늦봄과 여름꽃들을 내밀고 있답니다.

집 앞 꽃길도 따지고 보면 다 흙이 만들어 낸 놀이가 베푸는 재미일겝니다. 파 꽃은 일상의 작은 염려들을 재우는 재미까지 얹어 준답니다.

아침에

아침은 늘 새롭다. 아니 ‘늘 새로워야만 한다.’는 내 아집을 이 나이에도 버리지 못하는 내 고백이다. 아침 공기, 아침 바람소리, 아침 새소리 그리고 아침 하늘에 눈, 코, 귀를 맘껏 열어 제치는 내 습관에 대한 고백이다. 하여 아침은 늘 새로워야만 아침답다. 허나 내  주제에 어찌 그 욕심을 채우랴. 허다한 날 아침이 버겁고 이젠 그런 날들이 점점 늘어간다.

그래도 아직은 아침이 참 좋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렇다.

내 가게가 있는 샤핑몰은 거의 삼 년 째 공사중이다. 몰 안에 많은 가게들 중 내가 두 번 째로 이른 아침에 문을 연다. 거의 24시간 영업을 하는 그로서리 체인점을 빼고는 내가 언제나 제일 먼저 가게 문을 연다.

그런데 이즈음 종종 나보다 먼저 공사판 일을 벌이는 일꾼들 모습을 보곤한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아침 새소리보다 더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곤 한다.

일에 대한 감사함 때문이다.

세탁소 일을 한지 거의 서른 다섯 해가 가까워 온다. 그 사이 별 일 다 겪었다. ‘겨우 이런 일 하려고 이민 왔나?’, ‘빨리 내가 하고픈 일을 해야 할텐데…’ 등등. ‘혹’하는 생각에 빠져 이런저런 진창속을 많이 헤매기도 했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 지금은 그저 우리 내외 하루 일할 수 있는 터전이 있다는 것으로 그저 감사다.

오늘 아침, 가게 문을 열고 얼마 안되었을 때 아주머니(할머니- 솔직히 나는 이제 구분이 잘 안된다. 내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이므로) 한 분이 예쁜 꽃바구니 하나를 건네 주셨다. <내 남편이 쓰러져 넘어졌을 때 도와주신 당신들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라는 쪽지와 함께.

엊그제 일이었다.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를 나를 불렀다. 가게 앞에 누군가 쓰러져 있다고. 나가보니 거대한 체구의 노인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괜찮냐?”는 내 물음에 대답한 것으로 보아 노인의 정신은 말짱했다. 꼼짝을 못하고 있는 노인은 다리통이 내 몸통보다 큰 듯한 거구였다.  우선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려고 아내와 나는 거즈로 피를 닦고 붕대를 대며 물었었다. “911 전화를 해 드릴까요? 앰블런스 부를까요?” 노인은 연신 괜찮다며 자신의 차에 올라 앉게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신이 운전해 병원을 가겠노라며.

순간 참 나는 난감했다. 내 힘으로는 그의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버거웠으므로. 그는 거의 250파운드는 족히 넘지 않았을까?

하여 이웃가게 젊은이들과 내 가게 손님들에게 도와 줄 것을 요청했고, 노인을 겨우 겨우 그의 차에 태울 수 있었다. 노인이라고 했다만 나와 몇 살 차이나 났을까, 거의 내 또래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진이 빠진 나는 엉뚱한 감사의 맘이 일었었다. ‘아이고, 이렇게 작고 마르고 가벼운 내 몸에 대해 그저 감사. 어느 순간 내가 저 이와 같은 일을 당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그 누군가의 진을 빼진 않을 터이니…’

바로 그 노인의 부인이 오늘 아침 꽃바구니를 들고 감사를 전해 온 것이었다.

하여,  고백컨대…내가 아직 일을 할 수 있어 감사다.

무엇보다 아직은 아침의 새로움 느낄 수 있어 감사다.

아침에.

<행복에>

아무 수식 없이 제 이름을 그대로 불러 줄 사람이 더는 없을 줄 알았습니다. ‘영근아’. ‘영근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제가 사는 동네에선 이젠 없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누워 지내시는 아버님이 유일한데, 아버지도 이젠 제 이름을 잘 부르지 않습니다.

이젠 제 이름 앞뒤로 이런 저런 수식들이 늘 따라 다닙니다. 하다못해 ‘미스터’나 ‘씨’가 따라 다닙니다. 여기 친구들이 ‘Young’이라고 저를 부르곤 합니다만, 솔직히 ‘영근아’라고 부르는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답니다.

제 맨 이름 ‘영근아’나 ‘영근이’를 듣기 위해선 이젠 한국에 나가 어릴 적 친구들을 찾아 나서야만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나! 이런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반 년 전에 정말 오랜만에 만난 어릴 적 내 고향 신촌 친구들, 더더욱 대현교회라고 하는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함께 자란 옛 친구들과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며 서로의 맨 이름들을 부르고 듣는답니다. 저는 친구들을 경자야, 경애야, 병덕아 라고 부르고 친구들은 저를 영근아 라고 부른답니다.

앞뜰 체리나무 꽃이 만개한 날, 여름에 꽃피는 구근들을 심었습니다. 그렇게 흙과 함께 놀다 문득 바라보니, 어느새 꽃잎 떨구며 지는 튤립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한철 아름다움을 뽐냈던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녀석들이 제 각각 제 아름다움들이 다르더군요. 색깔과 모양들이. 튜립조차 다 같은 튜립들이 아니었답니다. 저마다 다 이름 하나씩 지어 주고 싶었답니다.

이제 저물어 가는 때에 진심으로 서로 이해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옛날 어릴 때처럼 제 맨 이름, ‘영근아’, ‘영근이’를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어 참 좋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행복에.

어느 덕담에

평생 동남아 선교 사역을 이어 오신 아니 지금도 이어 가고 계신 허춘중 목사님께서 제 가족 사진을 보시곤 덕담 한마디를 얹혀 주셨다. ‘두 분 옛날 70년대 모습이 있군요.’라고.

내가 그리 살지 못한 탓 때문일 터이지만, 젊었을 때 잠시라도 함께 했던 이들이 오롯이 한길, 외길을 변치 않고 걸어가며 늙어가는 모습을 보거나 듣노라면 그저 존경의 맘이 앞서곤 한다.

그이가 말한 ‘70년대’라는 말에 꽂혀 오늘 뜰 일을 하는 내내 내 스물 무렵이었던 70년대를 생각하며 잡초를 뽑고 꽃을 심었다. 신촌과 종로 5가, 서소문 거리과 골목을 헤매면서.

1970년대와 오늘 2020년대, 참 많이 변했다.

그 무엇보다 내 자신이 엄청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그나마 푸르고 맑았던 우리 내외의 70년대 모습을 기억해 주시는 허목사님께 감사를.

70년대나 칠십 대 나이 오늘이나 <세상엔 사랑이 가득한 것 같지만 우린 여전히 외롭고 허전합니다.>, <사랑, 친절, 섬김의 본질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현실 속에서 늘 깨어 살아가야 한다고 깨우쳐 주시는 호주의 홍길복 목사님.

세상 모든 것 다 변해도 <바닥이 하늘인 세상>에 대한 믿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오늘도 외치고 사는 내 참 벗, 대전 대화동의 김규복목사님.

필라델피아에서 80년 광주를 알리기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호 가족, 이태원 가족들과 이 땅의 이민자들을 생각하며 사람사랑, 이웃사랑을 외치며 사는 김경지선생을 비롯한 오늘 이 땅의 내 친구들.

어느덧 우리 세대도 저무는 때를 맞는다만….

비록 오락가락 비틀거리며 살아온 나이지만, 변치 않고 오직 신에 대한 믿음, 사람살이 올곧은 방향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온 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 뿐.

두어 주 전 작은 텃밭에 마구 뿌려 둔 상추 싹이 트기 시작했다. 꽃보다 아름답다던가? 새 싹을 바라 보노라면 늘 설렌다.

70년 대처럼. 암만, 화단엔 가을 국화도 새 싹이 올라오거늘, 내일에 대한 설렘만은…

족보(族譜)에

손님 하나가 가게 한 쪽 벽면에 걸린 사진들을 보다가 내게 던진 물음이었다. “가족인가 봐요? 이 사람은 누군가요?” 유독 얼굴 까만 내 며늘아이를  가르키며 던진 말이었다. 그 물음을 던진 이도 얼굴이 까맸다.

“제 며늘아이지요. 그 옆에 제 아들, 그리고 이 쪽 옆으로는 제 딸과 사위랍니다. 제 가족들입죠.”

이어진 손님의 물음, “며느님 고향은 어딘가요?” 잠시 주춤거린 내게 그녀는 다시 물었다. “며느님이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요?” 순간 나는 찔금하며 한 동안 말문이 막혔었다. 간신히 대답한 내 응답, “글쎄요? 며느리는 조상들이  이 땅에 온 지 몇 세대가 지난 아이라…” 그녀가 가게 문을 나서며 내게 던진 말, “한번 물어 보세요. 며느리께. 고향이 어딘지?”

나는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아들 내외에게 물었다. 며늘아이의 고향을.

내 우둔한 물음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이자 가르침이었다.

<아빠! 이미 몇 세대가 지난지도 몰라. 다만 조상의 누군가가 노예로 이 땅에 와서 뿌리를 내렸어. 아마 그 무렵 아프리카엔 나라라는 경계가 없었을지도 몰라. 어느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은 틀린거야! >

순간 나는 많이 아팠다. 진보 흄내 내며 사는 내가 얼마나 가짜였는지…..하는 부끄러움으로.